MB는 정녕 합려(闔閭)의 길을 걸으려는가?
I
춘추전국시대의 오왕 합려(闔閭, 기원전 514년~496년)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제6대 군주이자, 春秋 五覇의 1인이다. 이름은 광(光). 신하인 손무, 오자서 등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키고 覇權主義를 주창하였다. 말년에 월나라를 쳐들어갔으나 월왕 구천(句踐)에게 패배하여,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죽는다.
오왕 합려는 초나라에서 망명해 온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서 형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중원제패에 야망이 있어서 널리 인재를 모았는데 오자서의 천거로 제나라 출신 孫武를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그는 오자서, 손무 등을 인솔하여 친히 강대국 초나라와 몇 번이나 싸워서 기원 전 506년에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전과를 두었다. 그곳에서 주색에 빠져서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러는 동안 본국이 월나라에 침략 당하고, 동생 부개가 왕을 칭하고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가까스로 도망친 초왕을 추격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다시 본국에 돌아와 난을 평정했다. 미인을 좋아하고 허영심이 강한 합려는 초나라의 아름다운 궁녀와 휘황찬란한 궁궐을 잊지 못했다. 결국 그는 초나라의 궁궐을 모방한 대역사를 일으켰다. 그 책임자로 제나라에서 망명한 寵臣 백비를 임명하여 수많은 정자와 누락으로 구성된 고소대를 건축하도록 하였고 결국 국력을 탕진하였다. 그의 아들 부차의 시절에는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결국 패망했다. 춘추전국시대의 패권다툼 중에서 吳越의 쟁패가 가장 유명한데, 그 이유는 두 나라의 흥망성쇠가 너무 드라마틱하고 상대방을 멸망시키기 위한 온갖 책략이 총동원되었기 때문이다. 臥薪嘗膽이란 유명한 고사도 이 시절에서부터 연유되고 있다. 오나라왕 부차(夫差)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작더미위에서 복수를 맹세했고, 다시 월왕 구천이 부차에게 당한 패배를 항상 기억하고 쓸개를 먹으면서 복수의 칼을 갈았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 중원을 차지할 뻔 했던 춘추 5패의 인물 오나라의 합려는 왜 결국 실패한 군주가 되었고 아들 부차의 시절에는 월에게 멸망당했나? 그 원인은 합려의 성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합려는 부지런했지만 자만심과 허영심이 강했기에 말년에 이르러서 간신과 충신을 구별하는 혜안을 잃었다. 한마디로 합려 정권은 오자서와 손무 등 충신과 백비라는 간신이 뒤썩인 동거정권이었기 때문이다. 합려는 忠臣 오자서와 손무를 기용했지만, 동시에 백비라는 奸臣을 重用, 말년에는 백비가 제안한 화려한 고소성을 건축하여 국력을 소진시켰고 그 공을 인정하여 백비에게 太宰의 벼슬을 내린다.
백비란 인물은 초나라출신 망명객인데, 오자서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고 오자서가 합비에게 천거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재능이 없어서 시기심이 강하고 여색을 탐하면서 뇌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주군에게 아첨을 능사로 하여 주군의 귀를 즐겁게 했으며 여색을 밝히는 주군에게 항상 미인을 갖다 바치는 채홍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백비의 간교한 인간성을 간파한 손무는 초나라 수도에 입성했을 때 軍政의 失策을 물어서 몇 차례 백비의 제거를 건의했지만, 인정에 끌린 오자서가 반대하여 간신 제거의 좋은 타이밍을 놓쳤다. 합려의 말년, 고소성 축성 공사에 공을 세운 백비가 太宰로 임명된 이후는 오자서도 백비를 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백비에 대한 합려의 신임은 절대적이 되었다. 그러나 백배는 권세를 악용하여 월나라로부터 정기적으로 뇌물을 받았고 오나라의 정보를 건네주었으나, 누구도 감히 왕에게 백비의 정체를 알리지도 못했고 그를 제지하지도 못했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10년 전의 침략당한 원한을 풀기 위해 월나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사형수를 전선에 투입하여 적군의 목전에서 자결케하는 할복 전략을 구사한 월나라의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말려 승리의 목전에서 패배하고, 다리에 상처를 입고, 사망하게 된다.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부친을 죽였던 것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고,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II
왕이 된 부차는 오자서가 대장에, 백비를 부장으로 임명하여 오월전쟁에서 군사를 지휘하도록 했는데, 이 당시 손무의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이 시기에 백비의 국정농단과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정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추측된다. 복수의 칼을 갈았던 부차와 방심한 구천과의 오월전쟁에서 월왕 구천은 大敗하였다. 멸망직전에 월왕 구천의 일급 참모 대종과 범증은 생존책략을 준비했다. 백비라는 카드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백비가 재물과 여색에 탐한 인물임을 간파하고 그에게 접근하여 재물과 미인들을 상납하면서 백비로 하여금 구천의 구명운동에 앞장서도록 설득 공작을 진행했다. 그들의 공작은 적중했다. 뇌물공세에 눈이 어두워진 백비는 월나라 구천을 살려주고 신하로 삼도록 오왕 부차에게 간청했으며 구천은 십년교훈과 십년쟁취의 구호를 내걸면서 장장 20년을 臥薪嘗膽, 切齒腐心하여 오나라의 감시를 피하면서 국력을 배양하였다. 구천은 미인 西施와 궁녀들을 부차에게 바쳐서 정력을 빠지게 만들었으면, 한때는 마굿간에서 부차의 마부로서 일하기도 했다. 부차의 경계심을 풀게 하기 위해서 부차의 건강을 점검한다고 부차의 대변까지 먹으면서 자신의 의도를 감추면서 철저히 충성심으로 위장하였다. 그러는 동안 오자서는 월의 구천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충고했으나 西施의 여색에 빠진 오왕 부차는 판단력이 흐려져서 오자서를 내쳤다. 그러는 동안 무리한 각종 토목사업과 이웃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은 피폐해졌다. 백비는 忠言을 마다하지 않는 오자서를 반역죄와 불충으로 모함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구천은 오나라의 방심을 틈타 국력을 기르고 오나라가 제나라를 침공한 기회를 활용하여 방어가 허술한 오나라 수도를 치면서 역공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하면서 자결했다.
오나라의 멸망 중심에는 월과 내통하여 미녀와 재물을 상납 받은 반역자인 奸臣 백비가 있었다. 아첨꾼 간신 백비를 두둔하고 키운 것은 오왕 합려였고 막강한 권력의 장막으로 그를 비호했다. 당대에 뿌린 禍根의 씨앗이 아들 부차대에 오면서 종양처럼 커졌고 오나라 멸망이란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III
MB는 530만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10년만에 좌파정권을 청산하였다. 그러나 左右翼 同居政權으로 출발하면서 1년반만에 中道實用主義를 천명하여 우익 시민단체와 보수인사를 국정운영에서 철저히 배제하였다. 미국쇠고기 협상완료, 2012년 G-20정상회의 서울유치, 아랍에미레이트(UAE)로부터 400조원에 이르는 원전수주 확보, 중앙-동남아시아와의 자원외교 정착 등 부지런히 해외에 다니면서 세일즈외교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면서 경제대통령의 닉네임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쇠고기-광우병파동에 이은 불법폭력세력에 대한 응징과 친북좌파척결에 미흡, 사법부의 좌익성향의 판사들의 무더기 좌경판결에 대처가 미흡했고, 성남비행장을 무력화시키면서까지 롯데재벌의 롯데월드 2차 신축 허가를 강행하여 軍心의 이반과 保守의 불만을 自招했으며, 세종시 수정, 4대강사업 밀어부치기 등 토목사업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국론분열과 국력 소모를 초래하였다.
MB는 자신이 군복무 미필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청와대 참모수석과 장차관들 중에서 군복무를 하지 않은 인물들이 대량으로 포진하여 국민들의 실망과 좌파의 공세에 허점을 노출하였다. 4대강사업에 골몰한 MB는 반대세력을 달래기 위해서 골수친북좌파를 사회통합위원회에 감투를 주어서 정책에 협조하도록 무마하려했다. 심지어 김일성과 국수를 먹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자 황석영을 무엇이 아쉬운지 중앙아시아로 동행했으며 사회통합위원회에 기용하였으니, 좌파정권 교체에 헌신한 보수-뉴라이트가 MB의 이념과 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MB는 전투의 나팔소리를 올리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친북좌파와 싸우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거래하거나 타협하려고 했다. 특히 김정일과의 협상으로 남북한의 긴장과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 제3차 정상회담을 권고하는 청와대 참모의 姦言에 넘어가면서 보수를 실망시켰다. 또 좌파척결에 미온적인 중도-좌파-기회주의 성향의 인물은 은밀하게 좌파를 청와대로 끌어들여 기용하였다. 장사꾼 정치가의 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것은 530만 지지자들로 하여금 MB정부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천안함 사태에서 북한 김정일의 소행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유엔안보리 회부’ 이외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하면서 우유부단한 겁약한 지도력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김정일에게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중도-좌익 참모들에 둘러 쌓여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표면적인 구실은 “북한 김정일과 싸우게 되면 한반도에 무력충돌 등 크고 작은 분란이 발생하여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손실이 초래되고 또 MB의 지지도가 더 떨어지게 되기에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전쟁을 막겠다”는 것이다. 보수의 생각과는 정반대다.
6.2중간선거에서 집권당의 참패는 MB에게 국민들이 주는 경고장이다. MB의 독선적인 국정운영 방식과 적과 아군의 경계가 불확실한 중도실용주의 노선을 강조한 기회주의성향의 지도력이 보수를 분노하게 하여 한반도 좌익으로부터 협공을 당하면서 한반도 좌익의 공세로 인해 샌드위치 정부가 되었다. 결국 지지세력의 이탈과 좌익의 공세가 어울려져서 화근을 키운 것이다. 이대로 가면 친북좌파의 정권의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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