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뉴스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

"수난의 '난중일기'-후손 부끄러워"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당해 기간 중의 일기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웬일일까?

Written by. 김유혁   입력 : 2012-03-09 오후 5:57:00
공유:
twitter facebook
소셜댓글 : 0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희귀(稀貴)한 기록문서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진귀(珍貴)한 기록문서다. 왜냐하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의 상황을 작전지휘 자신이 직접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군기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옛날처럼 왕의 작전지휘를 수록하는 형식의 사관(史官)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바다 전쟁터에는 누구의 접근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난중일기'가 지니는 그 가치성은 무엇과도 비교가 될 수 없다할 것이다. 우리의 국토가 비록 3면이 바다인 반도국가라 하지만 우리는 국토의 연해환경(沿海環境)을 전략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관찰해 본 일도 없거니와 남해일대의 다도해라는 도서산재지역을 작전요지(作戰要地)로 활용해본 경험도 없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에 의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해전의 주전장(主戰場)으로서의 특수여건을 지닌 해역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23전23승의 쾌전(快戰)을 펴갈 수 있는 천혜(天惠)의 요새해역(要塞海域)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난중일기'는 그 해역을 전략개념으로 어떻게 응용했는가를 종합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문서라는 점에서 누구도 다시는 서술할 수 없는 유일본이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은 해전의 천재일 뿐만 아니라 해전에 있어서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의 인화(人和)의 이른바 천지인 삼합원리(三合原理)의 조화와 응용에 달통한 천재이었다.

 우리가'난중일기'를 지녔다는 것은 바다 천재의 후예라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바다천재를 길러낼 수 있는 유일본의 교재를 지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순신장군의 후예다운 자부심과 소양을 겸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난중일기'를 소중히 간직해서 보전승계(保傳承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공(戰功)의 탐욕 때문에 이성을 잃은 소인배들의 만행도 문제이지만, 역사유물의 한 조각도 은하계의 한 점 별처럼 불멸의 광명인 것임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이 오늘의 후회를 남기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뉘늦게나마 우리에게는 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전비(前非)를 함께 뉘우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7년간의 발자취를 엮어놓은 '난중일기'의 잔상(殘像)을 더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를 정리해보면>

0 1592년 '난중일기' 소실분 <1592년 일기 중 소실량 : 223일 분>

- 1591년 2월 이순신 장군 전라좌수사로 부임

- 4월, 일본군 21만명이 부산에 상륙, 충주 함락, 선조 서북방으로 피신

- 5월, 이순신 1차 출동, 일본수군 대파 <옥포>, 2차 출동, 일본군 대파 <당포>

- 6월, 선조 의주로 피신, 평양 함락 당함

- 7월, 이순신 3차 출동, 일본수군 대파 <한산대첩> 제해권 장악

임해군, 순화군 일본군에 체포, 휴정 승병 참전. 조헌 전사 이순신 4차 출동 일본군 대파

김시민 장군 진주공방전에서 대승

* 전란초기 4대 전첩 내용이 담긴 일기를 다 태워 버렸으니 어찌 이럴수가?

0 1593년 '난중일기' 소실분 <1593년 일기 중 소실량 : 170일 분>

- 1월, 평양수복

- 2월, 권율 장군, 행주산성 대첩

- 8월, 이순신, 3도수군통제사로 부임

- 10월, 선조 한성으로 귀환

* 이순신 장군이 가장 많이 해전을 전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1593년 '수군전투상보'가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상황을 상술한 일기를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해상전투는 현장지휘관이 아니면 그 상황을 누구도 종합적이며 체계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0 1594년 '난중일기' 소실분 <1594년 일기 중 소실량 : 37일 분>

- 3월, 이순신 함대가 고성 당항포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

0 1595년 '난중일기' 소실분 <1595년 일기 중 소실량 : 15일 분>

0 1596년 '난중일기' 소실분 <1596년 일기 중 소실량 : 80일 분>

- 9월, 풍신수길이 명군에 발기를 들고 조선을 다시 침공

0 1597년 '난중일기' 소실분 <1597년 일기 중 소실량 : 91일 분>

- 1월, 이순신 장군이 경상우수사 겸 통제사로 부임

일본군 20만 명 다시 침략(정유재란)

- 2월, 이순신 장군이 무고에 의해 2월부터 4월까지 투옥

2월에 이순신 장군 후임으로 원균이 부임

- 7월, 원균이 고성 등지에서 일본 수군에게 대파되고 원균도 전사

- 7월,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 중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부임

- 9월, 명군이 직산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

- 9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일본 수군 대파

0 1598년 '난중일기' 소실분 <1598년 일기 중 247일 분>

- 8월(18일) 풍신수길 사망(이 소식은 11월5일에서야 전해짐)

-11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대첩을 거둠

* 이순신 장군께서는 10월17일까지 일기를 씀

* 1598년 11월19일 진시에 판옥선 선상 지휘소에서 전사함.<동일자로 종전>

*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

바다에서 격전이 전개되었을 시기의 '난중일기'는 거의 선별적으로 소실된듯 하고 아울러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당해 기간 중의 일기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웬일일까?

◇ '난중일기'는 1592년(임진 1월1일부터 시작하여 1598년 10월17일까지 쓰인 것인데 그 가운데서 무려 863일간에 해당하는 기록이 불태워 없어지고 말았다. 물론 863일이라는 일수 가운데에는 이순신 장군이 1597년 2월부터 4월까지의 기간 중 투옥되어 쓰지 못했던 일자도 포함되어 있다.(konas)

김유혁 (전 금강대 총장, 단국대 명예교수)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로그인하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