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 공원에 얽힌 군인정신
타계한 가수 배호의 노래에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있다. 그런데 이 노래의 노랫말은 실제 ‘장충단’의 역사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장충단에 얽힌 역사는 매우 비통함을 느끼게 한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조선에 친일 내각을 만들어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러시아 등 삼국에 의한 이른바 ‘삼국 간섭’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친일 세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강자인 러시아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조선의 이러한 정책 변화가 당시의 민비(명성황후) 때문이라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여우사냥’이라는 조선국 국모 시해 계획을 세우고 책임자로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주한 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이 계획의 D데이 H아워는 1895년 8월 20일(음력) 새벽 3시였다.
이들이 경복궁에 범궐을 감행했을 때 이를 저지하는 궁궐 시위대와 총격전이 벌어져 경복궁 수비대장 홍계훈 등 많은 조선 시위대 장병들이 장렬하게 순국했다. 궁궐에 난입한 흉도들은 명성황후의 침전을 찾아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다가 건청궁 옥호루로 들이닥쳤다.
이때 영문도 모른 채 잠옷 바람으로 떨고 있던, 춘추 44세의 명성황후는 이들에 발견되어 무자비하게 칼에 찔리고 옷이 모두 벗겨졌다. 이들은 왕비를 바로 앞의 향원지 물속에 담가 숨을 끊은 뒤 나무 판자 위에 시신을 실어 옥호루 뒤편에 있는 녹원으로 옮겨놓고 석유를 뿌려 불살라 버렸다.(을미사변)
당시 시해 주범들이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왕비를 끌어내 두서너 군데를 칼질한 다음 나체로 만들어 국부 검사를 한 후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이 무리들이 왕비 시신의 국부까지 희롱하였다는 데 어찌 이 나라 산천초목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후 고종황제는 을미사변 때 장렬하게 순국한 홍계훈 등 수많은 장병들의 충성심을 적극 선양할 필요성을 느껴 이들의 영령들을 제사 지내기 위한 초혼단을 만들게 했다. 1900년 9월 19일 지금의 서울 장충체육관 근처에 있던 남소영 자리에 순국한 장병들을 위한 초혼단과 장충비가 완공됐는데 이 초혼단의 이름을 장충단이라 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1919년 6월 이 일대에다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광장과 놀이터 등을 꾸민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장충단은 6·25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지만 장충단 비석은 서울시 사적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장충단 공원을 찾는 사람들 중에서 이곳이 실제는 한국 군인정신의 메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우리 장병들은 장충단 공원을 찾을 때마다 오늘도 말없이 홀로 서 있는 장충단 비석 앞에 서서 이 비석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진실로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konas)
김지욱/ 성우회 정책연구실장 jeewoog@hanmail.net
- 관련기사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