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死者 조창호와 北에 억류된 국군포로
19일 타계한 귀환 포로 故 조창호 예비역 중위의 영결식이 21일 오전 성남시 분당서울대 병원에서 향군장(鄕軍葬)으로 거행되었다. 고인의 유해는 화장된 뒤 이날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봉안식을 갖고 충혼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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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대학 1학년생의 몸으로 자진 입대해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용전분투하다가 그해 5월 중공군의 포로가 된 조창호씨는 이후 43년간을 북한에 억류돼 지옥같은 삶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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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북한에서 유달리 힘든 삶을 살았던 것은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다. 적의 포로가 되어도 전력을 다해 탈출하겠다."는 군진(軍陣)수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포로가 된 후 그는 전향을 거부한 채 군진수칙 대로 수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곧 붙들리고 만다. 그는 '공화국의 적'으로, '반동새끼'로 낙인이 찍혀 13년간 감옥과 수용소, 교화소 등을 옮겨다니는 처참한 생활를 해야만 했고, 풀려난 후에도 30년 동안 지옥 같은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로인해 그는 '규폐증'이라는 불치의 병을 얻었고, 환갑을 넘겨 찾아온 조국 대한민국의 품에서 끝내 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7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가 전향이나 항복을 했더라면 국군으로서는 불명예를 안았겠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은 좀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군진수칙을 끝까지 지키며 올곧은 군인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를 '전쟁영웅' '영원한 국군'으로 부른다.
1994년 10월24일 국군수도통합병원, 64세의 老兵 조창호 소위는 탈진한 몸을 병상에서 일으켜 이병태 국방부 장관에게 귀환 신고를 했다. "육군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신고합니다." 해골(骸骨)같은 모습에 목소리는 힘이 없고 떨렸지만 '이것이 참군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세상에 일깨워 주었고, 전후 50년 동안 국민도 국가도 잊고 있었던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청천벽력의 함성이였다.
병상에서 몸을 추스린 조창호씨는 국립현충원을 찾아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위패(位牌)를 지우며 스스로를 '돌아온 사자(死者)'라고 불렀다. 이후 현역, 예비역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43년 포로생활을 고발하는 강연활동에 열중했고, 국군포로 송환과 북한의 열악한 인권에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통일부, 국방부 등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불편한 몸이였지만 지팡이에 의지한 채 미국의회 청문회 초청에도 응해 국군포로와 북한인권 실태를 고발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아닌 미국 국회에서 국국 포로 문제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며 "햇볕정책으로는 국국포로 송환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 강력한 대책을 촉구했다. 그는 또 "햇볕정책이 간첩·빨치산들만 북송(北送)시켰지 국군 포로 하나 데려온 일 있느냐"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이날 '전쟁영웅'의 영결식장과 안장식장에는 전·현직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각군 참모총장, 예비역 단체장들을 비롯해 한나라당 측에서도 조화를 보내거나 조문을 하고 갔지만, 고인이 생전에 햇볕정책을 비난했던 이유에서인지는 집권당인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에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화 한 송이, 조문 한 사람 오지 않았다. 조화를 살펴본 조문객들도 눈쌀을 찌푸렸다. 미국 인권단체 '디펜스 포럼'의 슈전 솔티 여사가 보내온 조화를 가리키며 "미국에서도 보냈는데···"라며 서운해 했다. 전쟁영웅을 마지막 보내는 마당에 여야가 따로 있느냐는 지적이다.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남파된 비전향장기수를 북송할 때는 호들갑을 떨더니 막상 국군포로 장례식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당 대표가 못오면 장군 출신 국회의원이라도 한 사람 보내야 되는 것 아니냐며, "자기들이 누구 때문에 별 달고 국회의원 하고 있느냐, 먼저 간 전우들과 조창호 같은 국군포로들 덕분 아니냐"는 비난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6·25전쟁이 끝난지 53년이 지났지만 정부는 현재까지도 북한에 끌려간 전쟁포로 수자를 정확히 파악치 못하고 있다. 휴전 직후 유엔군사령부가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국군포로 및 실종자 수를 82,318명으로 집계했고, 국방부는 1997년 10월에 공개한 '6·25참전 행불자(실종자) 명부'에서 행방불명자 신고와 병적부 확인을 거쳐 최종집계해 19,409명이라고 밝혔는데 이 중에 미송환 국군포로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이다. 대략 많게는 5만 명에서 8만 명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조창호 중위의 귀환 이후 국군포로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관심이 다소 높아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99년 1월29일 공포된 '국군 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이 하나의 예(例)다. 조 중위가 '귀환 포로 제1호'의 영광을 안은 후 지금까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65명이다. 11명의 국군포로와 그 가족이 이산가족 행사를 통해 상봉했고, 133명의 국군포로 가족이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입국했다. 그러나 국군포로나 그 가족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노력과 NGO들의 도움이었다. 정부가 북한과 협상을 통해 이뤄진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아직도 북한에는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는 540여 명에 이른데도 말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사선(死線)을 넘어오면 받아들이는 소극적·피동적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제 故 조창호 중위의 안장식장에서 유족 대표로 인사에 나선 최필립(조창호씨의 이종사촌 형)씨는 고인이 병상에서 마지막 남긴 말을 전했다. 고인은 북한에서 죽을 고생을 했지만 '귀환'이라는 한을 풀었고, 귀환 후에는 국민들의 관심과 성원 속에 12년 동안 한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기에 북한에서의 43년을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인은 두 가지 한을 풀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 하나는 자신이 탈북할 때 2남1녀의 자식들과 약속한 '통일된 날 만나자'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북에 억류된 전우들의 생환을 못 본 채 떠나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향군장' 장의위원장인 박세직 재향군인회장은 제주(祭主)로서 인사를 하면서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들을 하루속히 송환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각별히 노력해 달라"고 주문했다.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생존 국군 포로들의 고통은 곧 그 가족과 전우들의 고통이라며 이같이 요구했다. 박 회장은 또 "육신은 떠났지만 고인이 생전에 보여준 살신성인의 정신, 애국정신, 군인정신은 우리 후대가 이어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故 조창호 중위···, 그는 떠났지만 소중한 '정신'을 우리에게 남겼다. 이를 지키고 기리는 것은 정부와 국민의 몫이다. 정부는 고인이 생전에 보였던 국군 포로 송환 노력과 그가 남긴 유언, 그리고 전우들이 외친 요구가 헛되지 않도록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 포로 송환에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정부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소홀히 해왔다는 점을 깊히 반성하면서 말이다. 아울러 '조창호의 군인정신'을 60만 장병들이 귀감으로 삼아 영원히 기릴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국정 교과서에도 고인의 전쟁영웅담을 실어 장차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야 할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깊히 심어줘야 한다. (konas)
김 철 기자 konasnet@korv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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