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저지 밀파공작원 인생 보상하라"
'재일동포 북송저지 밀파 공작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 촉구 기자회견 열려
15일 오후 2시 여의도 국회정문 앞에서는, 재일동포 북송저지를 위해 1959년에 밀파된 공작원들이 "국가로부터 버려지고 내팽개쳐진 인생을 보상하라"며 명예회복 및 보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날 행사는 혹한의 추위속에서 재일교포북송저지밀파공작원회(대표 김성용)의 주최로 당시 공작원으로 활동했던 배성현(79세, 대전 거주) 씨와 유가족, 그리고 건국이념보급회, 자유민주수호연합, 나라사랑실천운동 등 보수시민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로부터 배반당한 울분을 토해 내 주위를 숙연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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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단체는 성명서를 통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조국을 위해 낯선 외국땅에서 옥살이로 헌신한 애국지사들을 그렇게 내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반일감정을 부추기던 좌익정권은 물론이고, 지금 이명박 중도정부도 재일동포의 북송을 막으려던 북송저지밀파공작원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승만 정부의 자유정신을 평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정부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며 “지금이라도 정부는 재일동포의 북송을 저지하려고 했던 자유투사들의 희생에 대해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평생 고생시킨 마누라며 자식들에게 남편이, 아버지가 나라를 위한 일을 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국가에서 인정해주고, 현재 살아 계시는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그들에 대한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해주는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호소했다.
당시 공작원 김형권의 아들인 김민규(52세) 씨는 “‘07년 4월일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재일교포 북송저지공작 사건을 진실로 규명했음에도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며 당시 공작원들의 명예회복과 유가족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 분개했다. 그는 “진실로 규명된 사건이므로 정부에서 명예회복 및 보상을 해줄 줄 알고 3년 가까이 기다렸다”며 이제는 유가족들이 나서서 故人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설 것 이라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말했다. 김민규 씨의 부친은 재일교포 북송저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밀파중 남해 해상에서 조난당한 공작원 12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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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코리아(인터넷뉴스)의 조영환 대표도 북송은 “일본과 북한이 짜고서 생지옥에 (재일동포를) 보낸 것”인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밀파된 공작원들은 ‘자유투사 애국동지’라고 강조했다. 또, 조 대표는 “어떤 사람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하는지 유공자에서 빼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자회견”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2007년 4월 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이영조)는 ‘재일교포 북송저지 공작사건’이 “1959년 경찰관 시험 합격자 24명과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회원 41명이 이승만 정권의 내무부에 의하여 강압적 또는 기만적 방법으로 재일교포북송저지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밀파되는 과정에서 12명의 공작원들이 조난을 당하고 24명의 공작원들은 도일 후 일경에 체포되고 복역하였음에도 방치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라고 결정사안을 밝힌 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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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후 이들은 한나라당 당사 앞으로 이동해 재일교포 북송저지 밀파공작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거듭 촉구하면서 한나라당 민원실에 성명서를 제출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konas)
코나스 강치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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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재일동포 북송저지밀파공작원들을 자유투사로 보훈하라!
소위 민주투사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넘치고, 자유투사들에 대한 국가의 보훈은 말랐다. 해방 후 나라를 위해 희생된 국가 유공자들이 너무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재일동포 북송작전을 저지하려던 '북송저지밀파공작원'들보다 더 희생적인 국가유공자들도 드물 것이다. 해방후 혼동상태에 있던 한반도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현명한 판단으로 남한 땅만이라도 자유민주체제의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우리 민족사에 최악의 민족상잔이 벌어져서 고통을 겪을 때에, 일본 땅의 재일동포들도 그 민족적 아픔을 겪어야 했다.
특히 재일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고유한 아픔은 바로 일본과 북한의 야합으로 일본에 남아있던 재일동포들을 북한으로 실어나르는 '재일동포 북송작전'이 진행된 사실이었다. 1945년 8.15 해방 무렵 200여만 명에 달하던 재일 동포들 중 140여만 명은 해방 직후 대부분 귀국했지만, 나머지 60여만 명은 타의 혹은 자의에 의해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잔류해 있었다. 이 재일동포들을 북한으로 미혹하거나 강요해서 송출한 것이 바로 일본과 북한이 짜고 벌인 북송작전인 것이었다.
1959년 4월 13일 제네바에서 재일한인 북송에 관해 일본과 북한적십자사 간의 회담이 열렸다. 북한 공산사회가 생지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이승만 남한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해 8월 11일 일본과 북한은 인도 캘커타에서 ‘북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간의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에 관한 협정(일명 캘커타 협정)’에 정식 조인한다. 그래서 이뤄진 것이 1959년 12월 14일 일본에서 북한으로 향하는 첫 북송선의 출발이다. 사실 재일동포의 북송은 공산주의의 망상에 빠진 무지몽매한 군중들의 자멸행렬이었다.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망상적 자멸행렬을 안타깝게 생각한 이승만 자유정부는 재일동포들의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해군을 경계태세로 전환시키기도 했지만, 별로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이승만 자유정부는 비상적 수단으로서 '북송저지밀파공작원'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66명의 요원을 긴급하게 차출하여 2개월 정도 교육시킨 후 일본으로 밀파하게 되었다고 한다. 재일동포의 북송을 막기 위해서 한국의 자유수호자들을 일본에 보낸 것은 세계적인 자유투사로 평가받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다운 발상이다.
1959년 9월 초 내무부 치안국은 경찰간부시험 합격자 24명과 재일학도의용대 출신 41명, 예비역 장교 1명 등 66명을 재일 동포북송저지 공작원으로 선발한 후에,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하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젊은 애국자들을 일본땅으로 재일동포의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서 밀파했다고 한다. 김정일 공산집단에 속은 재일동포들의 자멸행각을 막기 위한 이승만 정부의 참으로 비상한 자유수호 노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용맹한 자유투사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오늘날 이렇게 번성과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파견한 북송저지밀파공작원들은 조국를 위해 특수한 임부를 수행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 정부의 명을 기꺼이 받들어 낯선 일본땅으로 떠났으나, 그 곳에도 아무 것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구체적인 임무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에 도착했다고 한다. 안가도 없었고 접촉 라인도 없었다고 한다. 조국에서 급한 마음에 체계적인 준비도 없이 재일동포들의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서 낯선 땅에 떨어져, 한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은 조국을 위해 자생하면서 북송 저지공작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 4.19 군종폭란으로 이승만 자유정권이 무너진 후에 그 다음 정부로부터는 간간히 오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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