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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 김백일 장군

만주군 초급장교 복무 행적을 왜곡해 친일파로 규정, 동상철거 주장은 장군의 명예 훼손과 공적 폄하는 물론 국군 모독 행위이다

Written by. 서진현   입력 : 2011-08-01 오전 11: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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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백일(白一) 장군은 6·25전쟁 당시 1군단장으로 38 도선을 최초로 돌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장군의 혁혁한 전공과 애민정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최근 장군의 동상에 대한 훼손행위는 김 장군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김 장군의 짧지만 숭고했던 군인으로서의 삶을 되새겨 볼 필요가 크다.

 김 장군은 1945년 12월 월남해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 초대 3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장군은 해방 직후 정부가 채 수립되기도 전에 창군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1948년 10월‘여·순사건’발생시 5여단장으로 임명돼 14연대의 반란을 진압, 평정하는 등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6여단장으로 재임중 황해도 옹진지역에 대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6·25전쟁 발발시에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초기 작전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어 1950년 9월 1군단장(준장)으로 보임돼 낙동강 전선 안강 남쪽 형산강 일대에서 적 3개 사단을 격멸하고, 기계와 포항 북방으로 후퇴한 적까지 추격·소탕해 반격작전의 전기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격작전이 개시된 후 1군단 예하 3사단 23연대가 1950년 10월 1일 05시를 기해 가장 먼저 38도선을 돌파했다.(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제정된 계기가 됐다) 이후 1군단은 11월 30일 압록강 혜산진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10월 11일 소장 진급)

 그러나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으로 1군단과 미 10군단의 철수가 불가피한 상황이 됐고 이는 흥남철수 작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당초 아몬드 미 10군단장은 함정이 부족하고 피란민 중에 첩자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피란민의 승선을 반대했다. 그러나 장군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피란민이 우선이며 우리는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미 10군단장을 설득해 피란민을 철수시킴으로써 절망상태에 있던 10만여 명의 고귀한 생명을 구했다.

 1951년 3월 28일 장군은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대비하기 위한 군단장 회의에 참석한 후 군단본부로 급거 귀대하던 중 강원도 대관령 인근 상공에서 악천후로 타고 있던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은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부는 1951년 7월 26일 김 장군의 전공과 진충보국·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함과 동시에 중장으로 특진을 추서했다.

 이와 같은 김 장군의 업적을 고려할 때, 최근 경남 거제시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 내에 설치된 장군의 동상에 일부 시민단체가 검은천으로 덮고 쇠사슬로 감아 자물쇠를 채운 만행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아니된다. 장군의 동상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고 특별히 흥남철수시 은공을 기리기 위해 민간단체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건립된 것이다.

 조국이 없던 시절에 만주군 초급장교로 복무한 행적을 왜곡하여 친일파로 규정하고 동상철거를 주장하는 것은 장군의 명예를 훼손하고 공적을 폄하하는 것은 물론 국군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전쟁영웅’이자‘호국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김 장군의 동상이 잘 보존되고 관리돼 후대에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konas) 
 
서진현 (예, 육군소장. 재향군인회 안보국장)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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