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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판 무덤위에서 초석이 되다

Written by. 김민철   입력 : 2012-09-15 오전 11: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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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실시한 자원입대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으로 선정된 작품임.(편집자 주)

 때는 바야흐로, 2009년 3월 드디어 나에게도 나라의 부름이라는 신체검사통지서가 우편으로 날라 왔다. 남들 다가는 군대라 나도 별문제 없이 신체검사를 받았다. 얼마 후, 결과는 4급... “어? 4급?” 알아보니 공익으로 판정이 났단다.

 이유인즉, BMI(비만도신체지수)가 당시에는 17미만이면 4급 판정이었는데, 운 좋게도 16.9... 뭐랄까 솔직히 나도 공익으로 가고 싶었다. 아무리 남들 다 가는 군대라지만 안 갈수 있으면 가지 않는 쪽으로 택하고 싶었던 것이다.

 군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너무 많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성적인 나의 성격을 고칠 겸, 가족들의 설득도 있고, 생각해 보니 공익으로 근무하면서 시간이 남는 건 장점이지만 이 시간동안 빈둥댈 건 불 보듯이 뻔했다.

 또 앞으로 군대 말만 나오면 평생 공익이었다는 자격지심으로 살 것을 생각하니 고생 조금 더 하고 당당하기로 마음먹고 자원입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야, 이 새끼야 넌 뭣 땜에 네 손으로 네 무덤을 파냐.”라며 친구들은 온갖 쓴 소리를 해댔다. 막상 현역으로 간다고 맘을 굳게 먹고 ‘대단하다’란 말을 들을 거라 기대했던 나는 황당했다. ‘무덤이라, 그래 죽기야 하겠어?’ 솔직히 두려웠지만, 내 안에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 어떤 힘이 불쑥 생겨나며 다시 다짐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의무교육인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도 속으로는 내 실력으로는 실업계를 가서 적성을 키웠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남들이 많이 가는 인문계를 갔고 나는 여전히 그들의 성적이나 올려주는 일명 딱까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퇴를 하고 자기 나름의 공부 방법으로 좋은 대학에 입학한 친구를 보신 어머니는 나에게 재수를 권유하셨지만 그마저도 두려웠다. 하였든 간에 무슨 일이건 좁은 문보다는 남들에 휩쓸려서 들어가야 편하고 든든했다. 그러던 내가, 누구는 하고 싶어 생 이를 뽑는 그 룰루랄라 공익을 마다하고 현역 신청을 한다는 것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재검사 후 병무청직원이 날 불렀다. “자원입대 신청 하는 게 정말 어려운 결정이고, 쉬운 일이 아닌데 잘 생각했다, 잘하고 와”하며 응원을 해주니 나는 다시 의기양양 해졌다.
 
 훈련소는 보충대 의정부 논산 등 등 여러 군데가 있었지만, 나는 논산훈련소로 가게 되었다. 훈련소에 가니 나 말고도 1,800여명의 전우들이 있었고, 표정도 각각 이었다. 나처럼 긴장하고 있는 전우들도 꽤 많이 보여 위안이 되었다. 입소식 하기 전까진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가족들과 밥도 먹고 사진도 찍었다.

 아버지께선 내 긴장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시겠단다. 아직도 그 때 그 순간 장면을 생각하면 울컥하곤 한다. 연병장에서 행, 열을 맞춰서 경례를 하며 사회자 뒤를 바라본다.

 “충! 성!” 뒤편에는 나의 부모님 외 전우들의 부모님들이 보였다. 그 많은 인파속에서 단번에 부모님을 찾아냈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으며 아버지는 무표정이었음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회생활이라곤 대학 간 게 전부인 철도 안든 나를 군대에 보내는 게 걱정 반 기대 반이셨으리라...

 입소식 후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보면 나도 눈물이 나올 거 같아 단번에 고개를 돌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슬로우 비디오처럼 아직도 생생한 입소식을 마치고 훈련병생활로 접어들었다.

 훈련 중엔 상·벌점 제도가 있었고 잘하는 사람은 대접(?)을 받고, 말썽을 피우는 사람들은 벌을 받는 제도였다. 전화도 한번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는데, 시간은 3분. 나 말고도 다른 전우들도 전화를 해야 하기에 짧은 시간이 주어진다. 공중전화 앞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당황스럽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순간,  도스토예프스키의 최후의 3분을 생각했다. 시베리아 형장에서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주어지는 5분을 그는 어떻게 썼던가. 2분은 가족과의 인사에 쓰고, 나머지 3분은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그러면서 그는 지난 28년의 세월을 허비했음을 후회했었다.

 위기에서 벗어난 그에게 아마도 그 3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카라마조프 형제들, 죄와벌, 백치’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내 인생 20년을 돌아보려는 순간, 뒤에서 내 등을 밀었다.
 
 먼저 집으로 신호만 계속 가는데 인정사정없는 시계 초침은 더 바쁘게 한 바퀴를 돌았다. 수화기 너머 “여보세요?” 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꺽꺽대며 울었다. 엄마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놀라셨지만 나의 한마디는 “엄마! 그냥...”

 정말이지 그냥 눈물이 났다. 지금도 그냥 눈물이 났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도 가끔 느슨해져버린 시간에 뒹굴다가도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기다리던 3분을 기억하고는 화들짝 놀라곤 한다.

 훈련소의 훈련의 꽃이라 함은 야간행군 그리고 화생방을 꼽겠다. 야간행군은 유격을 마치고 하는 거라 주간행군보다 몇 배나 더 힘들었다. 행군 중반쯤엔 물집이 터져서 쓰러진 전우들도 보였고, 탈진 부상으로 실려 가는 전우들도 보였다.

 나도 생각 같아서는 솔직히 중도포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완주 후의 기분이 어떤 건가 궁금하기도 하여 오기라는 게 생겼다. 속으로 ‘다리가 부러져도, 발목이 으스러져도, 기어서라도 끝까지 도착한다.'는 결심 때문에 해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다음 훈련으로는 화생방인데, CS탄이라는 걸 터트려서 방독면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훈련이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 가스를 안 마시려고 숨참기, 빨리 착용하기를 몇 십 번이나 반복 연습해도 막상 실전으로 들어가면 실수연발하기 일쑤다. 나 또한 정화통을 끼우는 과정에서 탈착이 안 되서 5분 내내 가스를 고스란히 마셔야하는 악재를 겪었다. 아무리 연습이라 한들 실전이 중요하다는 걸 실감했다. 5분 내내 가스를 마셨지만 처음만 고통스러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마도 즐거움도 고통도 잠시만 지나면 다 내성이 생기는 모양이다.
 
 한 가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를 하나 꺼내 볼까한다. 어느 날 우리 2소대 4분대 생활관에 유급된 병사가 들어왔다. 자세한 사유는 모르겠으나 잠시 동안 우리와 같이 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물청소도 “내가 하겠다”며 혼자 힘든 건 도맡아 하고, 부식으로 떡이나 음료가 나오면 다른 사람들을 나눠주고 남다른 모범을 보였다.

 같은 분대원들이랑 반말하면서 친하게 지낸지 3일째... 갑자기 그는 다른 곳으로 유급을 가게 되었다며, 아쉽지만 그동안 즐거웠다고 인사를 하며 떠났다. 그런데 그 날 저녁 강당에서 ppt로 정신교육을 받기 위해 소대 전체가 이동하는데 그 유급생이 V를 2개나 달고 우리 분대원들을 향해 씨~익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소름끼치고 온몸의 털 하나하나가 쭈뼛쭈뼛 서는 듯했다. 알고보니, 중사분께서는 훈련병들의 생활을 몸으로 느껴보고 싶으셨단다. 아마도 내 생각엔 불편한 사항이나 인격 모독을 하는 조교들은 없는지 등 여러 가지 염탐하시러 오시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각개전투 사격 유격 수류탄 과정을 모두 무사히 마치면 정식 군인이 되는 자대배치를 받게 된다. 동고동락을 했던 분대원들과 서로 헤어지며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나를 포함한 몇 명은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바로 자대로 배치를 받는 줄 알았으나 나는 후반기 교육인 정보통신학교로 갔다. 특기명은 암호, 암호병으로 배치를 받았다. 암호병은 다른 보병 및 특기병과 달리 소수 정예로만 뽑혀 군복무를 하게 된다. 이에 따르는 자존심이나 자부심이 남다르기도 하다.

 나는 단내 유일한 병과 유일한 병사인 암호병으로서 최선을 다해 복무를 했다. 비록 중간에 암호실이 사라지는 불운을 겪었지만, 단내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하여 휴가를 받기도 했다. 그때 나는 오로지 그 종이를 다 외우겠다는 신념으로 2주 동안 맹훈련을 한 결과, 10분 내에 하면 합격이었는데 2분 40초 만에 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도 그리던 휴가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때 발휘되지 않던 내 두뇌의 힘이 어떻게 그걸 다 외웠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그렇다. 역시 난 안한 것이지 못한 게 아니었던 거였다. 그 사건은 내가 군대 오기 전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내 두뇌 실험인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군대를 자원입대한 것도, 암호병으로 뽑힌 것도, 1117공병단에서 군복무를 한 것도 다 내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입대하기 전 ‘나’라는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남아 돌아도 부모님 가게 한번 돌보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부모님보다 먼저 가게에 나와서 개장 준비를 하고 사장행세를 한다.

 부모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한 것 중 가장 잘한 거가 군대 간 거다. 사회에서 10년 고생할 거 2년 속성으로 가르쳐 준 군대에 감사한다.”고...

 학교에선 언제나 바닥권의 성적, 친구들에게 모임장소나 먹고 싶은 거 하나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던 답답한 성격으로 부모님에겐 늘 장래가 걱정거리인 장남이었던 나에게 부모님이 무엇이든 상의하시는 거 보면 어쩔 땐 나도 놀랍다.

 이제 나는 다르다. ‘하면 된다’가 아닌 ‘안 하면 안 된다’가 된 것이다. 내가 만약, 군대에서 지내온 2년의 궤적을 손목시계의 무늬로 새긴다면 내 미래의 인생 궤적은 절대로 슬프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누군가 나에게 군대 다녀 온 소감을 묻는다면, 거수경례한 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싶다.

 “충성!! 지금부터 김민철, 군대 소감을 보고합니다. 저는 군대에서 병상호간 서로 존경해주는 '예'와 상관에게 충성해야 하는 '충'과 전우들 간 힘들고 슬플 때 힘이 되는 '의'를 통하여 첫째, 스트레스가 쌓여 갈수록 인내심을 길렀고 둘째,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렀고 셋째, 혹한기와 어려운 훈련들을 통해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부모님께 '효'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앞으로는 공익과 현역을 갈등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결심으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보고를 마칩니다.”(Konas)

 김민철

*국보법개정서명바로가기 : http://konas.net/event/signatur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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