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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발자취를 후손에게 알려주자

Written by. 문갑식   입력 : 2011-12-18 오전 11: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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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말부터 서울시내 편의점에 이런 문구가 걸린 것을 보았다. ‘천년 만의 빼빼로데이’라는 것이다. 2011년 11월11일에 1자(字)가 6번 등장하는 것인데 이게 천년에 한번뿐이라는 뜻이었다. 상술(商術)은 이렇게 모든걸 활용한다.

 ‘밀레니엄’이 겹친 그날 빼빼로는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을 것이다.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과연 이날이 우리 국방사(國防史)에서 가진 의미를 생각해보니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66년전인 1945년 11월11일, 나라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해방된 지 석달도 안돼 나라는 좌우로 갈렸고 외세(外勢)는 신생국 대한민국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바람 앞의 촛불, 백척간두(百尺竿頭)란 말이 딱 어울리는 시대였다.

 그때 마도로스 출신 손원일(1909~1980)이 등장한다. 그는 11월11일 서울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조직한다. ‘조국광복에 즈음하며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동지를 구함’이란 광고로 해사대(海事隊)란 조직을 만든 직후였다.

 11월11일로 택일(擇日)한데는 ‘빼빼로데이’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있었다. 십일(十一)은 합치면 선비 사(士)자가 된다. 즉 11월11일엔 선비가 겹친 것으로 ‘해군은 신사도(紳士道)에 따라 운영돼야한다’는 신념이 담긴 것이었다.

 백선엽·백인엽 형제없는 육군을 상상키 어렵듯 그때 손원일이 없는 해군을 가정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아마 우리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종교가 없는 필자마저도 필연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 군(軍)은 절묘한 타이밍에 창설됐다. 그리고 6·25라는 전화(戰禍)를 겪으며 강해졌고 60년대 월남전 파병을 통해 더 세졌으며 지금은 세계에서 내로라할 강군(强軍)으로 성장했다. 불과 육십년 남짓동안 일어난 일이다.

 지난 10월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달 15일 경기도 파주 도라산평화공원은 붉은 팔각모의 물결로 넘실댔다. 행사 명칭은 ‘장단·사천강지구 전승(戰勝) 기념행사’, 바로 60년전 노(老)해병들이 이룬 기적같은 전승기념행사다.

 1951년 8월19일, 한국해병대는 강원도 홍천에 있었다. 상륙돌격부대인 해병대가 산악전(山嶽戰)에 투입된 것은 양구 도솔산(兜率山·1148)부근 ‘펀치볼’에서 미해병 1사단이 인민군 정예사단에게 궤멸적 타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미해병 대신 나선 한국해병 1연대는 1951년 6월4일 인민군 2000명을 사살한 뒤 주둔지를 홍천으로 옮겼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명목은 격려였지만 노회한 대통령의 속셈은 다른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배석한 밴 플리트 UN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탈환한 자랑스런 한미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을 지키게 하시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습네다.” 당시 전시작전권은 이미 미국에 넘어가 있었다.

 그걸 잘아는 대통령이 딴청을 부린 이유가 있다. 두차례 서울을 적에게 내준 이승만은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처럼 기록되는걸 겁냈다. 다행히 이승만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밴플리트가 있었기에 한미해병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그게 1952년 3월17일의 일이다. 지금은 이승만대통령을 ‘권력에 노망난 대통령’쯤으로 폄하하지만 그의 예감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당시 중공군사령관 팽덕회(彭德懷)가 휴전회담장으로 판문점이 아닌 서울을 점찍고 있었다.

 이런 무서운 목적을 갖고 그는 중공군 정예 19병단 예하 65군단 소속 193·194·195사단과 제8포병사단, 4만2000명을 개성에 배치했다. 여기 맞선 한국해병은 전 병력이 5500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숫자만 8대1로 불리한게 아니었다.

 중공군은 아래에서 위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 포진하고 있었다. 개활지 많은 서울 북부 지형에서도 덕물산(288)·군장산(213)·천덕산(203)을 모두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아군의 고지는 도라산(155) 뿐이었다.

 마침내 1952년 추석전야(前夜) 중공군의 대습격이 시작됐다. 전사에서 기록된 이른바 ‘1차 중공군 추계공세’다. 그 전투에서 아군은 참패했다. 사천강 전초진지를 빼앗긴 김용호 소대장의 자결담(自決談)은 지금들어도 비장하다.

 그는 자결하며 이런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부하들을 다 잃어버린 죄책감, 살아서 대할 수 없어, 대원들이 잠든 고지 위에서 죽음을 같이 하여 속죄합니다.” 훗날 밝혀졌지만 김용호소위 3형제는 모두 전장에서 산화했다.

 군에서 경북 영천에 사는 그의 부친에게 조위금을 전달하려했지만 두부배달 하던 가난한 아버지는 거절했다. ‘자식 목숨값을 받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후 우리 군은 목 잘려 돌아온 화랑 관창을 본 신라군처럼 변했다.

 분노한 한국해병은 10월31일부터 벌어진 2차 추계공세에서 대승했다. 1953년 7월27일 휴전 때까지 한국해병은 776명이 전사하고 3214명이 다쳤다. 중공군은 1만4017명이 죽고 1만1011명이 중상을 입었다. 명백한 우리의 대승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전에서 ‘10대 대첩(大捷)’에 포함될만한 승전의 날들은 여전히 해병대만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6·25중 기억되는건 전쟁 당일과 인천상륙작전일(9월15)일과 38선넘어 북진을 개시한 국군의 날(10월1일)뿐이다.

 1년 365일에는 하나같이 사연이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호국(護國)의 날’들은 잊혀지고 뻬빼로데이는 떠들썩하다. 얼마전 회고록을 연재하기 위해 만난 채명신 전파월한국군 사령관도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난다.

 “노병(老兵)들의 뇌리에는 아직도 60년 전의 6·25가, 40년전의 월남전이 바로 어젯일처럼 떠오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사라진다면, 누가 있어 이 땅에 뿌려진 호국의 이름 모를 한줄기 붉은 핏자욱들을 기억하겠습니까”

 실제로 극히 일부 언론에 6·25와 월남전의 숨은 이야기들이 공개될때면 많은 노병들이 다시 그 밑에 감춰졌던 사연들을 전해온다. 하지만 그것을 집대성하기란 기자 개개인의 게으름을 탓하는 것으론 불가한 것이라는 걸 고백한다.

 더군다나 지금은 사이버공간이 김정일을 추종하는 종북(從北)세력에게 장악된 상태이다. 심지어 교단(敎壇)과 일부 매체와 광장(廣場)과 같은 오프라인에서도 나라 위해 피흘린 충혼(忠魂)들을 능멸하는 발언들이 속출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있다. 6·25의 영웅인 백선엽 장군 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두고 좌파세력이 벌인 치밀한 반대운동 말이다. 길고 긴 인간사의 한가지 흠을 붙들고 늘어져 그것으로 전체를 매도해 군에 오욕을 넘기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일들이 빈번해질수록 우리의 정통사(正統史)는 마치 과거의 기억이나 전설이나 야담(野談)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은 아무런 의식없는 ‘철부지국가’ ‘단세포(單細胞)가 될 것이다. 그런 나라들이 필연적으로 가야할 말로(末路), 그런 나라가 반드시 겪게될 운명이 무엇인지는 3000년 세계역사가 보여주고있으니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월간 자유’지(誌)에 기고를 시작한지 세번째가 됐기에 이 지면을 빌어 제안하고자 한다. 국방부와 각군(各軍)이 어떤 형태로든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진 전쟁영웅과 호국인물을 부각시켜주길 바란다. 기왕에 국가보훈처가 발표하는 ‘이달의 호국인물’을 확대개편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발표하는데만 그칠게 아니라 이것을 국민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내기를 바란다. 예를 들면 소정의 상품을 건 퀴즈대회나 언론을 통한 특집기사, 인터넷 공간을 통한 홍보 말이다.

 모든 남자가 군 복무를 하는 나라,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나라에서 군의 발자취가 이렇게 무시돼서는 안된다. 몇몇 흥행하는 프로그램에서 보듯 아이디어가 없으면 차라리 베끼기라도 해야한다.

 그것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기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걸 하길 국방부에 바란다. 허물어지는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konas)
*이 글은 월간 '자유'지 12월호에도 게재됨.

문갑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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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산   

    우리나라가 존재하고 편하게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여가생활을 즐길수 있게된 것은 우리선배들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족에게 총칼로 무자비하게 학살한 좌익세력을 옹호한다는 것은 다시 제2의 6.25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된 생각이다 다시한번 안보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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