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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 장군과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올바른 이해②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 혁명에 충성을 다했던 동북항일연군의 대원”
Written by. 이영찬   입력 : 2011-08-19 오후 12: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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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北抗日聯軍과 김일성 부대, 비적활동 사례

 ▪ 東北抗日聯軍 형성 과정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그해 10월 12일 만주성위원회에 항일 유격대 창설 지시함으로써 유격대 건설이 시작 됐다. 당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유격대 건설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32년 6월에 중국공산당 중앙 북방 각성위원회가 全 중국 일체의 토지혁명을 추진하고 소비에트 정부 수립과 활동방향을 결정하고, 1933년 1월 동‧남북 만주지역 활동항일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해 ‘반일통일전선의 강화, 노동계급의 영도권 확보, 일제와 친일走狗의 재산몰수, 소수민족의 기본적 권리와 이익의 보장, 소비에트 정부의 해체, 인민정부의 수립, 다른 반일부대와의 공동전선 확립’을 추진해 나갔다.
 
 1935년에는 중국공산당이 ‘인민전선전술’의 채택해 종래의 인민혁명군을 抗日聯合軍으로 전환했다. 東北抗日聯軍 개편시 동북인민혁명군에 가담하고 있던 조선인 대원들이 東北抗日聯軍으로 대거 편입(당시 조선인 대원들 기성의 조선공산당원이 아닌 중국의 혁명에 충성을 서약한 중국공산당원들로 구성)했다.

 1936년 7월, 반일구국의 기치 아래 3로군 11군에 달하는 東北抗日聯軍을 조직했지만 당시에는 엄격한 軍律이나 기강이 없었고 중앙보급이 없었던 관계로 항일투쟁보다 인민약탈이 더 빈번하여 인민의 적으로 전락되었다. 이후 1940년 경 東北抗日聯軍이 붕괴되고 약 300여명이 소련 블라디보스톡 지역으로 도피했다

 ※ 1945년 8.15 해방후 북한정권 창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金日成, 徐哲, 崔賢, 崔庸健, 金策, 金一 등은 모두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 혁명에 충성을 다했던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대원들이었다.

 ▪ 김일성부대와 東北抗日聯軍(년도별 부대편성 과정)
 1931년 초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1932년 왕청 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 만주무력조직에 가담했다. 

 1934년 3월에 왕청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로 편입. 1935년 5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확대 개편했다. 이후 1936년 3월에는 안도현 미흔진에서 제2군이 東北抗日聯軍 제2군으로 재편되었는데 많은 조선인 유격대원들이 배속됐다. 이때 김일성은 제2군 휘하의 3개사 중 제3사 師長에 임명 되었다. 제3사 師長에는 오중흡, 박덕산(김일), 오백룡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6년 7월, 東北抗日聯軍 제1군과 제2군 통합해 1로군으로 재편되었는데 총병력은 6천명 이상이었다. 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결성과정에서 東北抗日聯軍 제2군 1,2,3사를 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4,5,6사로 각각 개편했다. 김일성이 師長이었던 제6사는 제4사와 함께 백두산지역으로 들어가 유격구 건설을 추진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의 추격 등으로 동북항일연군 궤멸직전에 이르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을 警衛旅(경호부대)와 3개 방면군으로 개편했다. 이때 제4사와 제5사를 통합하여 제3방면군으로, 제6사를 제2방면군으로 개편하여 다시 백두산 지구로 진출했다. 제3방면군에는 조선인이 60%를 차지했다.
 
 1938년 12월 유격대 편제 개편시에는 김일성을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임명했다.(당시 부대편제와 지휘관들의 면면을 볼때 이 부대는 조‧중연합 부대나 마찬가지였지만 조선인 대원들은 중국공산당 휘하에 있었다)

 1941년 3월 일‧만군 7만5천명의 병력에 의해 마감된 ‘治安肅正工作’으로 동북항일연군 3,000여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300명 정도가 소‧만 국경 근처 소련령으로 탈출했다(동만지역에서 쫓기던 제1로군과 제2로군의 일부부대들은 블라디보스톡 지역으로 탈출). 일제 토벌대의 주요 섬멸목표였던 김일성 부대도 1940년 가을에 국경을 넘었는데 이때 김일성은 월경 도중 소련군 국경경비대에 체포되었으나 먼저 입국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사령관 주보중의 신분 보증으로 석방되 블라디보스톡 근처 오케얀스카야 병영에 수용됐다.
 
 1942년 8월 1일, 소련극동군은 장차 일본군과의 전쟁 대비 동북 만주지역과 한반도 지역에 대한 정보획득 및 적 후방에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할 부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소련 붉은군대 제88저격여단)를 정식 출범 시켰다. 여장에는 주보중, 김일성은 과거 제1로군을 기초로 편성한 영장에 임명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는 정치적으로는 중공당 소속이었지만 군사적인 편제는 소련군 소속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 이와 같은 기록은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중국공산당을 위해 충성을 바쳤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 당시언론에 게재된 김일성 부대의 비적활동 사례 
 - 조선일보, 1936년 10월 1일 자
 (함흥) 28일 오전 한시경 함남대안 十三道溝新昌洞三浦里 이주 동포촌락에 공산군 김일성의 1대 50명이 습래하여 同村落民 전부를 한집에 감금하고서 대맥 10석, 畜豚 등을 모조리 빼앗은 후 동리주민 8명을 납치하여 그들에게 운반시켜 가지고 두메로 돌아갔다. 28일 오후 아홉시경 十三道溝龍泉里甲山洞 이주동포촌을 습격하여 의류 등 가장과 곡류전체를 빼앗아 가지고 갔는데 최근 장백현내에 집결하고 있는 수천명의 공산군들은 추석과 닥쳐올 동절의 준비로서 배전 맹렬히 이주동포촌락을 輪襲하여 이주동포들의 생명 재산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한 상태에 있다 한다.
  
 - 조선일보, 1936년 12월 5일 자
 (함흥) 지난 1일 오후 아홉시경 十五道溝接厚里에서 공산군 김일성의 1대 80여명이 나타나서 생하촌에 있는 동포가옥 백여호를 모조리 습격하여 식량, 의류 등을 있는대로 모조리 빼앗은 후에 19명을 납치하여 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한시경에는 十三道溝挑泉里 이주동포촌에 역시 공산군 김일성의 1대 20여명이 침입하여15호를 습격하여 가장, 곡식 등을 전부 빼앗은 후에 10여명을 붙잡아 갔는데 이 피해 兩村의 이주동포들은 한천에 헐벗고 떨고 있는 참상을 보이고 있다.
  
 - 조선일보, 1937년 2월 7일 자
 (新加坡) 지난달 25일 오후 열한시경 공산부대 김일성의 1대 약 40여명이 장백현 十九道溝官房子를 습격하여 민가 백여호에 불을 지르고 곡식 3백여석을 빼앗아 갔다. 4백여 이주동포는 엄동에 집도 없고 호구책이 곤란하여 정처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기 시작한다고 하는바 사회의 동정과 현청의 구제의 손길이 있기만 기다린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37년 7월 11일 자
 9일 오전 9시경 경기관총 2정을 가진 백여명이 돌연 十八道溝二頭崗 동쪽 한가동 부락에 나타나 좁쌀 1두, 전분 5두, 보리 4두, 장 한초롱, 기타 식량을 약탈하고 중국인 7명을 납치하여 동쪽으로 떠났는데 이같이 공비는 극도의 식량난에 빠져 어느때 강안에 나타날는지 알 수 없어 강안 일대는 의연 엄계를 계속하고 있다.
  
 - 동아일보, 1937년 7월 16일 자
 지난번 보천보를 습격하고 물러간 金日成, 崔賢, 曺國安 등 공산계통의 비적들은 목하 극도의 식량난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便衣隊, 기타 밀정을 강안에 파견하여 국경의 경비상황 기타를 조사하여 가지고 조선침입과 시가지 습격을 꾀하고자 여러 가지로 엿보고 있는 모양으로 국경의 경비진은 긴장하여있다. 그런데 十九道溝에 잠재하고 있는 합류부대 약 100명은 孫中藥 일파와 악수 합체하여 150명이 지난 12일 오전 3시경 十九道溝 中房子에 이동하여 감자 기타 곡물을 약탈하여 4명의 인부에 운반시켜 가지고 벽지로 돌아갔는데 이와 시간을 전후하여 12일 오전 2시 20명의 계통 불명의 비적이 十九道溝五頭岡에 출현하여 감자 기타 양식을 강탈 한 후 주민 12명을 납치하여 가지고 벽지에 들어가 前記 부대와 합류한 모양이라고 한다.

 ※ 위에서 보는 바와같이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는 당시의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부대의 일원으로서 약탈, 납치, 방화 등의 온갖 비적 노릇을 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도 일제기관이나 그의 소속된 또는 그와 결탁한 세력에 대해서라면 또 몰라도 국내에서는 살 수가 없어 男負女戴하여 만주로 건너간 불쌍한 이주동포를 상대로 그와 같은 약탈을 자행하였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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