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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전의 영웅 劉載興 장군 별세

6.25 남침 때 의정부 전선 지휘관, 2군단장으로서 다부동 전투와 영천 회전을 승리로 이끌어 조국을 구한 父子 장군
Written by. 조갑제   입력 : 2011-11-28 오전 11: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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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남침 때 의정부 戰線을 맡은 7사단장이었으며, 낙동강 방어전의 지휘관(2군단장)으로서 다부동 전투(1사단장은 백선엽)와 永川會戰을 승리로 이끌어 백척간두의 대한민국을 구한 劉載興 전 국방장관이 26일 오후 宿患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인 劉 전 장관은 제19代 (1971∼1973) 국방부 장관도 역임했다.

 1921년에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한 劉 장군은 충남 공주가 고향이다. 아버지 劉升烈(유승렬)은 대한제국 시절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다가 日帝의 압박으로 폐교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26기로 졸업한 사람이다. 유승렬 장군은 6.25가 났을 때 3사단장(대령)이었다. 父子가 開戰 때 함께 사단장이었다.



6·25전쟁 때 함께 從軍했던 父親(左)


 유재흥은 일본 육사를 1941년에 졸업한 후 일본 본토 방어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항복후 귀국, 국군의 前身인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가 받은 군번은 10003이고 대위였다. 그는 建軍과 建國에 큰 공을 세웠다.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있다가 1948년에 발생한 4.3 좌익 폭동을 수습하기 위하여 만든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전보되었고, 제6사단장-제2사단장 겸 태백산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북한군 게릴라 침투 저지 작전을 폈다. 27세의 사단장이었다. 제주 전투사령관 시절 道內에서 횡포가 심한 서북청년단을 견제하고 도민들을 보호하는 데 애썼다고 회고록 '격동의 세월'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1950년 6.25 남침 때 북괴군의 主攻 루트 중 하나였던 의정부 전선을 맡은 7사단장으로서 奮戰(분전)하였다. 당시 미국 대사 무초씨는 퇴임후 증언에서, 국군의 버티기 작전을 높게 평가하였다. 7사단은 對전차 무기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고도 3일간 서울 북방을 지켜냈다.

 유재흥 장군은 6월28일 한강을 도하, 부대를 재편성한 한 뒤 1군단 부군단장으로 임명되어 후퇴작전을 지휘하다가 7월20일 2군단이 창설되자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2군단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게 임무였다. 예하 사단은 백선엽 준장의 1사단, 김종오 대령의 6사단이었다. 남침 직후 6사단은 춘천을 3일간 방어함으로써 북한군의 한강 南岸 진출을 지연시켜, 국군이 수도권에서 포위되는 사태를 막았으며, 1사단은 문산 축선을 지키다가 절서 있는 후퇴를 한 부대였다. 한국군의 최강 사단들이었다.


1954년 12월11일, 육군 교육총장 재직시 중앙에 앉은 劉載興 장군. 劉장군 바로 뒤가 朴正熙 준장(당시 포병학교장). 제2열 오른쪽 끝이 李厚洛 준장(당시 비서실장


 백선엽 장군은 다부동 전투의 영웅으로, 유재흥 장군은 영천회전의 영웅으로 戰史에 기록된다. 9월 초 북괴군은 영천을 일시 점령하였다. 영천을 통제하면 경주-대구-포항으로 진출할 수 있다. 부산 교두보의 死活이 걸린 전략적 요충지였다. 劉載興 장군은 미군 전차 부대의 도움을 받고, 제1, 제6사단에서 1개 연대씩 차출, 주력인 8사단과 7사단(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결단으로 2군단에 배속)을 지원하게 하여 반격작전에 나섰다. 9월12일 2군단은 4000명의 북괴군을 사살하고 5대의 전차를 파괴하면서 영천을 탈환하였다. 이 戰功으로 유재흥 장군은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29세였다.


1959년 제1군사령부를 방문하여
劉장군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右)


 유재흥 장군은 동부전선을 지키던 3군단장 시절인 1951년 5월엔 중공군의 기습으로 현리에서 부대가 포위, 붕괴되는 敗北(패배)를 겪기도 하였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 그는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밑에서 참모차장을 지냈다. 이때 이용문 작전국장과 박정희 차장이 이종찬 총장과 미군의 묵인하에,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려는 이승만 대통령 제거계획을 세웠다. 유재흥 차장은 참모회의에서 이 계획을 좌절시키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유재흥 장군은 일본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한국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육사 교육에서 우러나오는 강직한 업무자세와 외유내강한 인품과 교양으로 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신뢰가 컸고, 장교단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5.16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실력자가 되는 李厚洛 정보부장과 朴鍾圭 경호실장도 유재흥 장군의 측근 부하로 있었다. 그가 육사 부교장 시절 배출한 육사 8기생이 5.16 혁명의 주체세력이었다.

 유재흥 장군은 육군참모차장을 네 차례나 역임하였으나 총장을 한 적은 없고 중장에 그쳤다. 1960년 4.19 혁명 때는 1군 사령관이었다. 한때 참모장으로서 그를 보좌하였던 이가 朴正熙 소장이다. 4.19 직후 轉役한 그는 태국,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로 일하다가 1970년에 대통령 안보 특보를 거쳐 이듬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1974년부터 80년까지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재직후 물러났다가 1991년에 星友會 회장이 되었다.

 석유공사 사장으로 있던 197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 회견에서 "포항서 양질의 석유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정보부가 위장회사를 차려 포항에서 시추하다가 검출된 기름을 석유공사에서 분석하였는데, '원유가 아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곧 유재흥 사장에게 "기름이 아니다란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압력이 내려와 "나의 생애에 처음으로 몇달 동안 신음한 적이 있다"고 한다(회고록).

 유재흥 장군은 합참의 前身인 연합참모본부 총장을 지낸 적이 있다. 合參은 유족과 협의를 통해 劉 전 장관의 영결식을 오는 29일 오전10시 국립 서울 현충원 현충관에서 정승조 합참의장을 葬儀위원장으로 하는 '합참장(合參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태종(61)씨를 비롯한 2남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02-3410-6902, 010-5391-4805

(http://www.chogabje.com)

조갑제 (조갑제 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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