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요금 10환, 영화 관람료 30환, 목욕비 50환, 참기름 1병 100환, 신문대금 300환…. 1956년도 시중 물가다. 지나간 시절의 물가나 생활 풍속이 궁금하다면 서울시 자양동에 사는 박래욱 씨(69세)를 찾아가 볼 일이다. 그는 195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일기와 금전출납부를 써서 1997년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된 인물. 그런 그가 최근 자신의 보물 1호인 일기장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 측은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산업화 등 일반인의 눈으로 본 격변기 한국의 생활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그가 이번에 기증한 일기는 1950년 4월부터 2005년 3월까지 55년 동안 쓴 것. A4 용지 2만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일기는 1년에 두 권씩 묶여 총 98권으로 제본되어 있다. 개인사가 담긴 일기를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동기를 박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몇 년 전 교육인적자원부 지원으로 서울대 이문우 교수 팀이 제 일기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쓴 일기의 경우 국한문 혼용으로 쓴 데다 흘림체로 휘갈겨 제대로 해독해 내질 못하더라고요. 이대로 두면 내 손자 손녀들까지도 못 알아보겠구나 싶었습니다.”

 박 씨가 일기를 쓰게 된 동기는 “남자 나이 열 살부터는 인생의 흔적을 남겨야 하고, 우물을 파되 한 우물만 파라”는 부모님의 가르침 때문. 열두 살 때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로 자란 그는 “일기 쓰기가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전남 장성군 진원면 학전리. 수도경찰학교를 4기로 졸업했던 아버지는 김성수 부통령 경호원을 지냈다. 아버지는 서울에 가있고, 형제는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수예와 서예에 능했던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인 그에게 사자소학을 가르치면서 일기 쓰기를 적극 권했다고 한다. 6·25 동란만 아니었어도 그는 유복한 가정의 장남으로 평탄하게 자랐을 것이다.

 “장성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한 건 1950년 7월이었어요. 경찰이었던 아버지는 숙청 대상 1호였지요. 국군이 오기를 고대하며 여기저기 숨어 다니던 아버지는 결국 한 달여 만에 체포돼 인민군에 의해 처형됐고, 달포 후 어머니마저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으셨죠. 그때 동생의 나이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그날의 처참했던 풍경을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서기 1950년 8월 31일 목요일 맑음, 구름

 마을 옆 논밭을 둘러보고 뒷산 학정봉으로 올라갔다. 산 중턱 공중에 까마귀 몇 마리가 빙빙 돌고 있었다. 까마귀는 딴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그곳에서만 돌고 있었다. 그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아버지께서 손이 뒤로 묶인 채 피를 흥건히 흘리시고 엎드려 죽어 있었다. 신발과 옷을 보니 틀림없었다. 가슴에는 두 군데 칼자국이 등까지 뚫려 있었다.

 서기 1950년 10월 14일 토요일 구름, 비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큰어머니와 예쁜 큰누나도 마을 옆 서태골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셨고, 영암 아짐과 쌍촌 할머니 등 10여 명도 같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 무지막지한 공산당 앞잡이들은 사람을 몽둥이나 대창으로 끔찍하게 죽였다고 했다. 묘를 쓰고 온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학호 일기 중에서)


 6·25 때 공산당에 학살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된 그는 동네 아낙들에게 젖동냥을 하며 어린 동생을 키웠다. 등에 업은 동생이 엄마를 찾으며 젖 달라고 울어댈 때면 심장을 면도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고 한다. 끝없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아 한동안 일기 쓰기를 중단했던 그는 “그리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밥은 굶더라도 일기 쓰기는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형제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부모가 유산으로 물려준 땅 덕분에 큰아버지의 보호 아래 고등학교까지는 마칠 수 있었으나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누구나 공무원이 되고자 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어릴 때 받은 충격과 상처 때문에 ‘죽어도 공무원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광주기계공고 방직과 졸업 후 한동안 방직회사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가내수공업으로 편물을 하던 아내와 결혼했고, 5·16 혁명 후 직장을 얻지 못해 행상을 했지요. 화장품과 시계 등을 서울에서 떼어다 파는 장사였는데, 곧잘 해서 논을 다섯 마지기나 샀습니다.”

 1950년대 기록한 가계부

 집에서 광주 송정리까지 100여 리나 되는 거리를 매일 자전거로 왕복하며 행상을 하던 그의 소원은 한 달에 2만 원의 고정 수입만 있으면 좋겠다는 것. 그의 눈에 한약방 수입이 괜찮아 보였는데, 때마침 한약업사 자격시험이 있었다. 낮에는 무허가 한약방에서 일하다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 끝에 1971년 36세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증을 얻었다.

 “그 길로 남면 소재지에 한약방을 냈어요. 한 달 수입이 무려 4만 원이나 됐지요. 고아가 된 후 처음으로 생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 후 한약방을 광주로 옮겨 20여 년 동안 정성을 다해 약을 지었다. 덕분에 전국에서 알아주는 한약방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박 씨가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은 2003년 9월. 자신의 손으로 키운 동생과 자식들이 모두 서울에 살아 따라오게 됐다고 한다. 그에게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동생은 지금 건축업을 하고 있고, 아들은 의대 졸업 후 교수로 있습니다. 맏손자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에요. 이 아이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살아왔단다’ 하고 내보일 수 있는 기록물이 있어서 좋습니다.”

 시인 고은이 박 씨의 일기를 읽고 쓴 시.

 박 씨는 1980년대 후반부터 새벽 3시에 일어나 일기를 쓰고 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에 하루를 정리하노라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좋단다.

 그는 일기와 금전출납부뿐만 아니라 한약 처방전(1971년~2001년)과 전남도민증(1962년), 국민병역신고증(1961년), 인감증명원(1965년) 등도 함께 기증했다. 서울 자양동에 있는 감초당한약방에는 증조부, 외조부, 어머니가 쓴 편지와 당시 사용했던 붓과 벼루도 잘 보관되어 있다.

 “20년 동안 받은 각종 영수증도 있고, 나침반, 약저울, 가위, 명찰, 지압기 등 없는 게 없어요. 모두 우리 가족의 숨결이 배어있는 소중한 물건들이죠.”

 이제는 한의원이 아닌 한약방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서울 광진구에서 유일한 한약방을 꾸리며 지금도 꼬박꼬박 출근하고 있다.(konas)

 

출처 : 월간조선 탑 클래스 200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