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겨보는 순국선열의 날
1939년 10월 3일부터 12월 5일까지 중국 사천성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이청천·차리석 두 의원은 앞으로 매년 11월 17일을 전국의 동포가 공동으로 기념하는 ‘순국선열 기념일’로 정하자고 제안해 통과됐다.
11월 17일을 특정한 이유는 순국한 이들이 망국을 전후해 그 수가 많고 또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싸우다 순국했으니 나라가 망하던 때의 하루를 기념일로 정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해서 을사년의 망국조약 체결일은 34년이 지나 순국선열 기념일로 다시 태어났다.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일본군이 궁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위협하는 가운데 대한제국 광무황제 주재로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에 앞서 이미 일왕의 특사 이토오는 황제를 알현하고 조약 원문을 제시하며 체결을 협박했다. 이 조약은 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부를 대신하여 외교사무를 총괄하고, 향후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 없이 국제조약을 체결하지 못하며, 한국 황제 곁에 일본인 통감을 두어 외교를 총괄함은 물론 내정까지 간섭하게 하는 등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으로써, 주권국가의 지위가 사실상 상실되는 망국조약이었다.
어전회의 당일 일본헌병은 조약에 반대하던 참정대신 한규설을 끌어내고, 미리 매수된 이완용(학부대신), 이지용(내부), 박제순(외부), 이근택(군부), 권중현(농상공부) 등 소위 을사5적을 앞세워 이튿날 새벽 2시에 조약을 늑결(勒結, 강제로 체결)해 버렸다. 광무황제의 수결과 옥새의 압인(押印)이 빠진, 결재도 없는 원인 무효의 조약이었다.
망국조약의 늑결은 3일 뒤에 알려졌다. 조야에서 일본을 규탄하고 조약에 날인한 대신들에 대한 통렬한 비난이 빗발쳤다. 조약 반대 상소가 이어지고 상인들은 철시로 호응했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오적의 암살을 기도했다. 항쟁은 자정 순국으로 절정에 달하여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황제와 2천만 동포에 드리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고 뒤이어 전 참판 이명재, 학부주사 이상철·이설·송병선이 죽음으로 조약에 항거했다. 본격적 항일의 서막이 망국조약의 늑결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1939년 11월 이역만리 타국에서 최후의 결전을 다짐하며 이날을 순국선열 기념일로 제정한 선열들의 역사의식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11월 17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을사5조약이 늑결된 치욕의 날이라서 이를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일까. 이날을 순국선열 기념일로 제정한 그분들마저 ‘순국선열’이 된 지금 그날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때다. 11월 17일은 을사5조약이 늑결된 치욕의 날이 아니라, 치욕을 극복하기 위해 떨쳐 일어나신 순국선열들의 뜨거운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는 날이다.(konas)
이병구 /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
* 국가보훈처는 17일(토) 오전 11시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을 거행합니다.
* 이 칼럼은 15일자 국방일보에 게재한 글로써 코나스가 필자의 양해를 구해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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