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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歪曲에 '역사교정 위원회' 構成하자

Written by. 임소영   입력 : 2008-04-28 오후 5: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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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가 2006년 1월 7일부터 방영했던 ‘서울 1945’는 親北左翼세력의 확산에 발악하던 KBS의 역작(?)으로 남았다. “좌우에 대한 선입관 없이 작은 영웅들의 숭고한 이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사회민주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그들은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목적은 같았으나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이 드라마는 현재의 결과를 놓고 예단하지 않으려 한다. 어느 쪽이든 자유와 평등을 위해 헌신한 그들의 삶은 다같이 숭고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장황하게 제작진의 의도를 설파했었다.

 무던히도 많이 쓰던 [자유와 평등],그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나라를 구현하겠다는 데 누가 말리겠는가. 문제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동족을 300만이나 죽음으로 몰아넣은 반란자들을 향하여 ‘같은 민족’이라면서 공산주의자들을 내놓고 찬양고무하며, 바로 그들과 평등세상을 살겠다면서 한술 더 떠 “그들의 삶은 다같이 숭고했다”니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 反逆의 억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과거 10년 동안, 교과서에서 역사(國史)는 선택과목으로 내몰리고, [대한민국 建國史]는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歸結 짓고, ‘ 호기심 많고 감수성 넘치는 청소년들을 겨냥하여 ‘우리사회의 불평등, 또는 불평등사회’등의 제재로 自己主導的 토론 학습을 進步的學習방업으로, 교단에서는 가르침의 장이라기 보다는 聲討場이 되었던 亡國的 현실에 걸 맞는 교육소재로 ‘서울 1945’는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그 드라마는 말 그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역사왜곡의 현장이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건국을 주도한 장택상 등을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도 않은 최운혁이라는 가공인물을 통해 여운형을 매우 신비스러운 민족주의자로 연출해냈었다.

 ‘서울 1945’는 解放前後史를 劇化하여, 보는 이는 다분히 [다큐멘터리]적 관점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피드백하는 시간이 되는 셈이다. 이런 경우 작가는 “좌우에 대한 선입견 없이”를 내세우며 소설일 뿐이라고 꼼수부리는 주장을 하지만, 다분히 역사의 현장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존재하는 마당에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고 넘어가기엔, 극중 가공인물이 정도에 넘치게 멋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져, 저들의 제작의도를 훨훨 달성하는 것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첫째, 극중에서 여운형의 암살 사건은 虛構가공인물 박창주를 통해 그가 이승만이 여운형에 대해 불편해하는 심기를 읽고 여운형의 암살을 모색하게 되는 것으로 전개되며, 저격수 한지근에게 암살하기 전날밤 김두한이 권총을 수교하고 악수를 나누었고 그 바람에 암살 직후 장택상 수도청장에게 불려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하고 책망을 들었다고 좌파들은 김두한의 회고록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고 있으나, 그것은 신빙성이 없는 이유는 김두한은 그 당시 남로당원 정진룡 살해사건으로 拘束中인 상태였다. 白衣社(중국 국민당의 襤衣社를 본 따서 임정계열이 만든 반공테러단) 단원이었던 韓智根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만을 부풀려 여운형암살 배후는 이승만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갔다.

 그러나 진실은 따로 있다. 前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과 김일성은 공산당 주도권확보를 위해 공동의 敵인 박헌영 타도에 손을 잡고 뭉쳤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하게 되고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게 되자 모의내용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반공청년으로 위장한 한지근을 越南시켜 자연스럽게 白衣社에 접근토록 하여 여운형을 暗殺하였다는 것이다. 체포된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6.25를 만나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박갑동의 주장대로라면 김일성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한지근을 제거함으로써 영원한 입막음을 한 것이다. 그 이전에도 김일성은 비밀리에 성시백을 남파하여 박헌영의 지하조직을 와해시킨 적이 있다. 성시백은 주로 경찰을 이용하여 박헌영의 조직을 일망타진하였다. 그는 자신이 접근한 박헌영의 조직이 드러나도록 하는 수법을 써왔는데, 공작이 마무리될 무렵 성시백 또한 김일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가 경찰에 노출되어 제거되어 버림으로써, 이 또한 영원히 베일 속에 가리게 되었다. 이것이 토사구팽이며 역사적 진실이다.

 둘째, 극중 가공인물 문석경이라는 여자 피아니스트에게 추파를 던지는 장면을 연출하여, 이승만을 늙고 추한 거의 치매에 가까운 노망스런 모습으로 그려졌었다. 이는 전혀 사실무근이며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에 대한 冒瀆이며 陰謀라고 볼 수 있다.

 진실은 이렇다.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감리교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 이승만은 일찍이 부모의 성혼약속에 의해 班家의 풍습대로 早婚하였으나, 그 결혼은 이혼으로 마감하고 홀로 渡美, 독립운동에 전념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58세 되던 해 독립운동을 위해 유럽여행 중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여사(당시3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그 이전에 하와이 망명생활 도중 임영신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후문이 있는 것 뿐, 그의 뒷얘기는 깔끔했다.

 이승만은 또한 금전문제에 있어서 깨끗하고 엄격한 삶을 유지했는데, 이는 대통령 재직시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건국 직후 대한민국은 재정이 未確保된 상태에서 각료들은 물론 대통령조차도 봉급이 지불되지 않은 때가 많았는데, “우리가 독립운동 할 때는 언제 봉급 받은 적 있나”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 李承晩이었다. 이승만의 청렴결백한 삶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결단코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이 부패한 독재자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드라마 ‘1945’에서 신격화되어 있는 여운형은 과연 도덕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가? 공자는 定心應物이면 不讀書라도 有德君子“라는 말을 하였다. 즉 ‘天下萬物에 대응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글을 읽지 않았다 해도 그 사람은 곧 德이 있는 君子’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인물이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초기에 일본군이 필리핀의 마닐라와 싱가포르를 함락하자, 그는 일본의 大東亞 空營勸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錯覺을 하고, 고이소(小磯國昭) 조선총독이 부르자 萬事除癈하고 달려가 그의 요구대로 皇國臣民 誓詞를 하고 충실한 臣民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전향 후 여운형은 일제의 어용단체인 ‘민족유신회’조직을 추진했다. 그리고 일제군부가 만든 興亞同盟 조선지부장직을 맡고 안재홍을 끌어들였다. 1944년 3월에“반도 2천5백만 동포에게 호소한다” 題下의 格文을 발표, 조선의 청년학도들이 일제 전쟁승리를 위해 총궐기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여운형은 이 과정에서 일제로부터 거금의 자금지원도 받았다. 해방 후에도 그의 이 같은 본성은 변함이 없어 일제가 제안한 治安勸移讓을 전적으로 수락하여 建準과 人共을 조직 선포하였다.

 일제의 패망이 코 앞에 다가온 45년 8월8일 소련은 對日 宣戰布告를 하고 전격적으로 한반도로 진격하였다. 이는 다 이긴 바둑에 훈수 한수 두고 자기덕분에 이겼다고 우기는 격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미국은 긴급히 38도선을 제안하여 소련군의 남진을 막았다. 망해가는 와중에 있는 일본도 이 기회를 놓칠세라 조선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한 음모에 적극 가담했다. 여기에 덥석 물려든 인물이 바로 여운형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처음에 민족진영의 송진우에게 일본의 재산과 생명보호를 조건으로 한 治安權移讓을 제안했으나, 송진우는 상해임시정부가 돌아올 때까지 인수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일제는 차선책으로 여운형과의 교섭에 들어갔는데, 내심 이런 기회를 不感請固所願하던 여운형은 다섯 가지의 조건만 걸고 이 조건을 수락했다.

 그런데 일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遠藤)는 교섭과정에서 여운형에게 ‘한강을 경계로 하여 京城에는 소련군이 주둔할 것’이란 거짓 정보를 주었고 이를 맹신한 여운형은 공산당 일색으로 建準을 발족시켜 후일 민족진영과의 분열을 자초한 것이다. 엔도는 이때 조직활동비 명목으로 미화 450만 달러를 주었으나, 여운형은 이 돈의 일부를 착복했고, 이것이 문제가 되자 자금관리를 맡겼던 박석윤을 월북 도피시켜버렸다.

 여운형은 또 건준 발족 직후 자신의 부재 중 찾아온 친일파 박춘금이 거금을 내놓으려 하자 건준 재정위원장 이규갑 목사가 호통을 치며 내쫓았는데, 이를 오히려 못 마땅히 여겼다고 한다. 돈에 관한 한, 여운형은 敵과 同志가 없는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온 관계로 도무지 돈문제 만큼은 누가 주는 돈이었든 간에 묻지 않고 받아들였다. 가히 김대중의 스승격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는 金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해방후 김구가 귀국한 뒤 김구의 측근들은 광산갑부 최창학을 “친일파숙청”운운하며 협박하여 그의 집인 경교장을 빼앗았다고 한다. 경교장은 건축 당시 호주에서 자재를 수입하여 지은 호화주택이었다. 김구는 귀국 직전 중국의 장개석이 이승만과 공동으로 사용하라고 준 돈 미화 20만 달러를 미국으로 부쳤다가, 이승만 박사의 귀국으로 그 돈이 중국으로 되돌아와 임시정부 駐華대표단 단장(임시정부의 駐中대사격)이던 박난파를 거쳐 다시 김구에게 전달되자, 그 돈의 대부분을 이 박사와 상의도 없이 한독당 조직비용으로 써버렸다. 돈에 있어서는 성인군자가 따로 없는 것이다.

 여운형에게는 해방 당시 5세 가량인 막내아들 붕구가 있었는데 이 아이의 어머니는 부인 진씨(해방당시 60세)가 아니었다. 여운형이 기생에게 낳은 아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몽양 영운형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여운형과 김일성을 찬양한 소설 ‘적과 동지’의 작가이기도 한 강준식에 따르면, 이 아이의 어머니는 일제가 여운형에게 미인계로 제공한 일본인 밀정이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정치가로서의 자질이나 도덕성 무엇하나라도 크게 본 받을 구석이 없는 인물이었다.

 김일성의 도덕성과 여자관계는 굳이 따져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문제에 있어 그는 가장 추잡한 인간이다. 짐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근 기쁨조 경험자의 증언에 의하면 남여교관의 성테크닉과 피임방법, 실제 성행위까지 직접 주기적으로 교육받는다고 한다. 김일성은 만주 마적단 시절에도 빨치산끼리 집단성행위를 자주했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운동권에만 있는 性공유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특히 몇 년 전 열린당의 386의원들은 광주 5.18묘역을 참배한 후 여성인 임수경을 대동한 상태에서 접대부가 있는 술집으로 가 온갖 해괴한 짓거리를 하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은 일이 있다.

 김일성은 본처 김정숙을 빨치산 시절 어딘가에 약탈을 나갔다가 납치해 와서 데리고 살았는데 집권 후 무식한 본처에 염증이 나자 자신의 비서인 김성애와 바람이 났고 때마침 병으로 수술중이던 김정숙을 의사를 협박하여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적으로 문란한 김일성을 보고자란 김정일 또한 그의 피를 물려받아 천하의 호색한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가정교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8세 되던 해 집의 가정부를 협박하여 실제 성행위를 시도한 일이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은 악랄하게도 도덕적으로 수도승과 같았던 이승만을 호색한으로 덮어씌우는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극중에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이승만과 부하인 박창주, 좌익들 사이에 눈치만 보고 있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虛構의 설정인 것이다. 실제 장택상은 수도경찰청장 시절 공산당으로부터 몇 차례 저격 내지는 폭탄투척을 당한 일도 있으나, 그때마다 매우 대단하고 과감한 처신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폭탄의 파편에 맞아 얼굴에 부상을 당한 일도 있었으나, 직접 권총을 뽑아들고 저격범을 추격한 일도 있었다. 그는 매우 화끈하고 대범한 인물로서 전형적인 경상도 기질이 있는 사나이였다. 그는 초대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한 외국기자로부터 “영국 에딘버러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느냐”는 질문에 “나는 특별히 공부한 것은 없고 그저 하루에 두 마디씩 영어만 꼬박꼬박 배웠소”라고 말할 정도로 率直淡白한 인물이었다.

 또한 극중 가공인물 박창주의 친일경력을 잔뜩 묘사한 뒤 그의 입에서 “이 나라는 너희들(공산당)의 나라가 아니야, 이 나라를 망치는 빨갱이들은 다 죽어줘야겠어”라는 말을 통해 우익은 근본적으로 부도덕하고 사상적으로 과장되고 우수꽝스러운 이미지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또한 극중의 이승만이 여운형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국에 위기감을 느끼고 불만을 토로하여 어떻게든 남조선이 공산화되는 것만큼은 막아야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작가나 연출가가 해방정국의 상황을 전혀 모르거나, 알고도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나오기 훨씬 전인 46년 5월 지방순회 도중 전북 정읍에서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건국]구상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 이전에 소련대표 스티코프의 반탁세력 배제발언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오히려 남한단독으로 건국 정부수립을 구체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이를 실행하기 위해 미군정사령관 하지중장을 무시하고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UN과 미 정부를 상대로 한국문제를 조속히 UN으로 이관하여 한반도 전역에서의 자유총선거로 정부수립을 주장했던 것이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이와 같은 대담한 행보에 겁을 집어먹은 것은 바로 여운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 좌익내부에서 만이라도 주도권을 잡고자 46년 2월 좌익연합체인 민주주의民族戰線을 결성하여 허헌, 박헌영, 김원봉 등과 함께 5인 공동의장단에 피선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는 박헌영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여운형은 평양으로 사람을 보내 박헌영을 제거하기 위해 김일성에게 연대를 제의했는데 김일성은 처음에는 여운형을 지지하는 체 하였지만, 좌익3당 합당(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과정에서 여운형이 주도권을 상실하고 박헌영에게 밀려나 사회노동당을 창당하자 태도를 돌변하여 신민당 위원장 백남운을 평양으로 소환하여 크게 비판한 뒤 오히려 공개적으로‘사로당에 대한 결정서’를 발표하여 사망선고를 해버리기까지 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아직까지 북한에서 완전한 권력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형편인지라 박헌영과 드러내놓고 정면대결을 벌이기까지는 매우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김일성은 불리하면 동지도 철저하게 버리는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어차피 사회노동당은 남한경제에서 지지기반도 배경도 없는 사생아와 같은 존재였다. 여운형으로서는 좌익3당의 합당을 통해 김일성을 등에 없고 박헌영 일파를 제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좌익의 지도자로 우뚝서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자신의 인민당만 박헌영에게 자진해서 갖다바친 꼴이 되었다. 이로써 여운형은 정치인으로서 弔鐘이 울린 것이다.
 
 이 상황에서 여운형은 살아남을 방법 두 가지를 생각해 내는데, 하나는 평양을 다녀와서 김일성에게 최소한의 양해를 구한 후 46년 12월 소수의 지지자들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한 것이다. 이 근로인민당은 남로당에 비하면 구멍가게와 같은 존재였다. 다른 하나는 미군정에 납작 엎드려 미군정 사령관 하지중장이 추진하던 좌우합작을 그의 보좌관이던 버취중위의 후원을 받아가며 그럭저럭 하는 듯한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이 좌우합작이 성사되리라고는 김규식도 여운형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하지 중장이 추진하는 일이라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달리 추진해볼만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한번 해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좌우합작은 미국 본토에서도, 소련에서도, 북한에서도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았고, 오로지 하지사령관만이 버취중위로부터 보고를 받아가며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만나서 자기들끼리 백날 합의해봐야 책임있는 위치도 아닌데, 될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하지 사령관 또한 책임 있는 정치인도 아니고 정치감각이 있는 것도 아닌 당일이라도 당장 인사명령이 떨어지면 떠나야 할 단순한 직업군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사정인데 여운형이 추진하는 左右合作이 뭐가 대단해서 이승만과 박헌영이 동시에 긴장을 하였단 말인가. 작가의 연출의도가 심히 疑懼스러움을 자아내며, 대한민국 建國史에 대하여 무식하고, 너무나 유치한 작태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 와중에 미소공동위원회는 47년 7월 無期休會되고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이미 미국과 소련은 사실상 각자의 노선으로 단독정부수립을 구체화하였고 3개월 후인 47년 10월UN은 조선반도에서의 자유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 이로써 여운형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이었다. 그 와중인 47년 7월19일 여운형은 서울 혜화동 로타리에서 저격당해 숨진다. 여운형 저격직후 그의 신변보호인이던 박성복은 권총을 빼어들고 범인을 쫓아 혜화동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경찰이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범인을 놓쳤다고 진술하였다. 
 
 이 때문에 사건의 배후에 경찰이 있다는 말이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는 박성복의 진술일 뿐 실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목격자가 없으므로 박성복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지어낸 말일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사전에 박성복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는 경찰로서는 총성이 울린 상태에서 권총을 들고 달려가는 사람을 잡은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 것이다.

 여운형은 대중정치인으로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는데 정치지도자는 좌익이던 우익이던 자신의 정치노선에 충실하여야 하고 항상 鮮明性을 잃지 않아야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야만 국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멀리 미국에 떨어져 있으면서 매 끼니를 날계란과 바나나 한 개로 대신하면서도 끝까지 조선독립을 포기하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그만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김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전차표 검사원으로 일하는 동포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상해 불란서 공무국에 추l직한 엄항섭의 봉급으로 여러 명이 근근이 풀칠을 하고 살았어도 한 순간도 한 눈팔지 않고 열심히 싸워왔기 때문에 비록 정권은 잡지 못했어도 자신의 지지기반만은 항상 닦아놓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어떠하였는가. 비록 김일성에게 아부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방송계에 침투한 몇 몇 김가집단 추종자들로부터 그들의 좌파적 목적달성을 위한 소재로 선택되어 유치한 찬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당대를 같이 산 사람들 중 여운형을 志操있는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같은 좌익이면서 남로당이었던 박갑동은 그에게 혹평을 서슴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가난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난 이승만이나 常人으로 자란 김구는 어렸을 적부터 가난을 끼고 살아 어려움을 극복할 역량이 있었지만, 원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성장한 여운형은 자신이 잘 나갈 때는 당당하다가도 어려울 때는 아무나 붙잡고 늘어져 도움을 구했다. 일제로부터도 돈을 받아 好衣好食하며 살았고 해방 후에는 조선총독부와 김일성, 미군정에 늘 손을 벌리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이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겠는가.

 驚天動地할 일은 2005년 3.1절에 노무현의 직접지시에 의해 여운형은 국가보훈처로부터 建國勳章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정부는 그 직후 북에 남은 유일한 여운형의 혈육인 딸 여원구(77세)에게 그가 거절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유족연금으로 월 130만원씩을 지급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무산된 바 있다.

 그후 강만길은 광복60주년 기념사업회 위원장 자격으로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평가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고 좌파들의 공격논리와 이론을 생산해 내는 전초기지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사 명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이것은 연방제통일을 앞둔 노무현정권이 대한민국 정통성(한반도 유일 합법국가)을 稀釋瓦解 시키려는 일련의 사전 整地作業에 KBS가 앞장서서 분위기 조성을 위한 先務工作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KBS는 이미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부터 언론계에 침투한 주사파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이러한 類의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등을 제작해서 김가집단을 찬양하고 그들의 赤化統一노선에 동조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을 계획된 스케줄로 꾸준히 방송送出하면서 대한민국 사회의 左傾化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한 그들 주장의 常套煽動的인 내용은 대체적으로 “이승만은 정권을 잡기위해서 친일파와 손잡았다” “이승만은 미국과 손잡고 분단을 고착화 시켰다” “6.25전쟁은 남침도 북침도 아닌 강대국들 간의 대리전일 뿐이다” “여운형은 민족주의자다” “김일성은 항일 영웅으로 북한인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박헌영은 실제 미국의 간첩이었다”등이다. 대부분이 매우 유치하고 말도 되지 않는 金家집단의 주장 그대로이다.
 
 그나마 겉으로는 양비론을 주장하는 척하지만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김가집단에 대한 찬양과 보수우익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가 대부분이었다. 이제는 이들의 뿌리가 깊이 내린 상황에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해서 스스로 해결될 문제는 절대 아닌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공영방송인 KBS를 하루빨리 민영화시켜 방송의 편집권을 국민에게 넘기는 수밖에 없다. 그 길만이 우리 사회에서 언론기관을 가장한 허가받은 간첩집단을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출처:올인코리아) 

 林素影(북한인권 논설가/올인코리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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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이걱정된다   

    국가안보와 망하는일을 막기위해 육사생도들 신원조사를 다시하여 좌경쪽에 무리들은추려 내야 한다. 10년간 좌경들이 한짓을 보면 앞으로 장기적으로 20년뒤에 좌경쪽이 요소요소에 군부를 장악한다면 아찔한 생각이든다. 미리싹을 제거해야한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5-01 오전 9: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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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kwj3697    수정

    엄청나게 왜곡된 근.현대사를 바로 잡아 정사로 기록되기를 바랍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4-29 오전 9: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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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2.21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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