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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미사일 개발, 6자회담 실패와 한국의 대책

Written by. 송종환   입력 : 2011-05-03 오전 10: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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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50년대 중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참여를 내세워 핵 관련 기술 연구에 착수한 북한은 한국, IAEA, 미국과 각각 핵 폐기 협상과 합의를 한 후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 선언, 2006년 10월 9일, 2009년 5월 25 일 함북 길주군 풍계리에서 두 번의 핵 실험, 2010년 11월 초 원심분리기 1,000 여개를 갖춘 우라늄 농축 시설 공개 등으로 9번째 핵보유국을 자처하고 있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지난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폐기하고 남북한 간의 상생 공영을 위하여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펴자 북한은 대남 강경입장으로 대응하면서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과 11월 23일 연평도 포격과 같은 군사도발까지 하였다.

북한은 2010년 서해에서 있은 군사적 도발에 대한 국내외 압력을 호도하기 위하여 2011년들어 전 방위 대화공세와 함께 북한이 신고한 검증문제로 중단된 6자 회담 재개를 요구하다가 한미 군사훈련을 앞두고 다시 강경자세로 돌아갔다.

 2월 27일 북한군 판문점 대표부는 2월 28일부터 3월 10일까지 한국과 미국이 연합하여 실시하는 키 리졸브 훈련과 4월 30일까지 실시되는 독수리훈련에 대해 “핵 공갈에는 우리 식의 핵 억제력으로, 미사일 위협에는 우리 식의 미사일 타격전으로 맞설 것“이라고 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전략과 전술로 서울 불바다 전과 같은 무자비한 대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3월 1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정당방위를 위한 물리적 대응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같은날『로동신문』은 “전쟁이 터지면 초래될 것은 핵 참화뿐”이라고 협박하였으며, 리비아에 대한 서방 연합군의 공습에 즈음하여 3월 22일 외무성 대변인은 국제사회의 군사 개입에 대비하여 핵무장 강화 교훈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내세워 폐연료봉 재처리와 우라늄 고농축으로 개발해온 것으로 보이는 핵무기를 한국에게 쓰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며 북한 핵을 폐기하지 않겠음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북한 핵무기가 한국에 대한 실체적 위협이라는 인식에서 2011년 들어 한국 사회에서는 학계, 언론계와 국회를 중심으로 자위를 위하여 독자적으로 핵 무장을 하거나 1991년 철수한 미국의 전술핵을 재반입하자는 논의가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하여 북한의 핵무기와 이를 운반할 미사일 개발 실태. 6자회담의진행 과정과 핵·미사일 공격 가능성과 예상 피해를 검토한 후 한국이 취하여야 할 대책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북한의 핵무기 개발 경위와 제1차 북한 핵 위기

북한은 1955년 3월 과학원 제2차 총회에서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 설치 결정을 한 후 1956년 3월 소련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 1962년 11월 영변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듬 해 소련에서 연구용 원자로(IRT-2000, 2M We)를 도입하였다.

북한은 원자력의 군사적 목적 이용 방지와 평화적 목적 이용 장려를 위해 설립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1974년 가입하고 핵무기 보유국의 핵무기 축소 및 비보유국으로의 핵무기 확산을 방지하고자 하는「핵 확산 금지조약」(NPT)에 1985년 12월 가입하였다. 

또한 북한은 한국과 1992년 1월 20일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하고”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를 요지로 하는「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합의하고, 1992년 4월 1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와「핵안전협정」을 발효시켜 핵무기 개발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그동안 해온 핵개발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과는 북한 핵시설 사찰 반대와 한미연합 훈련 영구 중단을 요구하여 1992년~1993년 기간 중「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에 따라 진행된 상호 핵사찰 논의를 결렬시켰다. 

북한은 1992년 4월 10일까지 IAEA 와의 핵안전협정 체결을 지연시킨 끝에 동년 5월 4일16개 핵 시설에 관한 최초보고서를 제출할 때 폐연료봉 재처리 시설 신고를 누락하고 또 누락된 시설에 대한 IAEA의 특별사찰을 반대함으로써 1993년 3월 제1차 북한 핵 위기가 발생하였다.

북한이 IAEA 대신 미국과 핵무기 폐기 문제 협상을 고집하여 미국이 나서서 1994년 10월21일 북한과「제네바 기본합의문」을 합의하였다. 이 합의문에서 북한은 흑연 감속로와 관련 핵시설을 동결하고 경수로 완공 시 핵 시설을 해체하는 대신 미국은 2003년까지 100만 KWe급 경수로 2기 지원을 주선하고 대체에너지로 매년 중유 50만 톤 공급을 약속하였다. 

미국은 경수로의 주요 핵심 부품의 인도 이전에 북한이 1992년 5월 4일 IAEA에 제출한 북한 내 모든 핵물질에 관한 최초 보고서의 정확성과 완전성을 IAEA가 검증할 것을 주장하고 북한은 이를 경수로 제공 지연 구실이라고 하면서 IAEA 검증을 거부함에 따라 이 합의문도 이행될 수가 없었다.  

3. 제2차 북한 핵 위기 후 6자 회담 개최 경과와 실패

2002년 1월 25일 취임한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의 특사로 켈리(James Kelly)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일행이 동년 10월 3일~5일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북한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 “우리는 그(플루토늄재처리에 의한 핵무기 개발)보다 더 한 것(고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도 가지게 되었다“고 함으로써 제2차 핵 위기가 발생하였다.

북한의 새로운 핵 개발 의혹에 대해 미국은 북한의 비밀 핵 개발로 제네바 합의가 무효화되었음을 표명하고 12월부터 대북 중유 지원중단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12월 들어 5Mwe 원자로, 핵연료 제조공장, 영변 8000여개의 사용후 핵연료봉 저장시설, 재처리시설 등에 IAEA가 설치한 감시 카메라를 제거하고 IAEA 사찰단원을 추방한

후 2003년 1월 10일 NPT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한반도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1월 14일 북한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부시대통령이 다자간회담을 제의한 후 중국이 북한을 설득하여 4월 23일~25일 베이징에서 미-북-중 3자회담, 8월부터 27일부터 한국·북한·미국·중국·러시아·일본이 참가하는 6자회담이 성립되었다. 

2003년 8월 27~29일 간에 개최된 제1차 회담, 2004년 2월 25일~28일 간에 개최된 제2차 회담과 2004년 6월 23일~26일 간에 개최된 제3차 회담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대화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이를 위하여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단계적 과정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특히 제2차 회담에서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은 북한 핵 문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CVID: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방식에 따른 평화적 해결에 동의를 하는 의장 성명 형식으로 최초로 서면 합의를 도출하였다.

이러한 합의를 바탕으로 후속 회담들에서는 아래 요지의 네 건의 합의문서가 채택되었다.





구 분 주요 내용
2005. 9.19

공동성명

(제4차 6자회담)

o 6자회담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임을 재확인

o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6자회담 당사국들로부터 에너지 등 지원 및 6자회담 참가국들로부터 평화적 핵 이용권 존중

o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 안정 노력 및 직접 당사국의 별도 포럼에서 한반 도 평화체제에 관하여 협상

2007. 2.13

합의

(제5차 6자회담)

o 제1단계: 북한이 60일 내 핵시설을 폐쇄·봉인하고 IAEA 사찰 수용하면 한국 중유 6만 톤 지원, 미·북/ 일·북 관계정상화를 위한 양자대화 개시

o 제2단계: 2007년 말까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고 핵시설

을 불능화하면 미국은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과정 개시 및 대적성국 교 역법 적용 종료 및 추가 95만 톤 중유 지원

o 제 3단계: 우라늄농축프로그램에 의한 핵무기 개발, 기존 핵탄두 해체는 제2단계 완료된 후 협의

o 30일 내 6자회담 내 한반도 비핵화, 미·북 관계 정상화, 일·북 관계정상 화, 경제·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논의하는 5개 실무회의 구성

2007.10.3

합의

(제6차 6자회담)

o 북한은 2007년 내 모든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 모든 현 존 핵시설 불능화 완료와 핵물질, 기술 및 노하우 불이전 재확인

o 미국과 일본은 대북 관계정상화 이행 재확인

-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 과정 개시 및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과정 진전에 대한 공약 상기

o 중유 100만 톤 상당 대북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 제공과 적절한 시기 에 6자 외교장관회담 북경 개최 재확인

2008. 7.12

합의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

o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6자의 전문가로 구성된 검증체제 수립

- 시설 방문, 문서검토, 기술인력 인터뷰 및 6자가 만장일치로 합의한 기타 조치, 필요시 IAEA는 자문과 지원 제고

o 합의사항 이행에 관한 감시체제 수립

o 핵 포기와 경제·에너지 지원 시간 계힉 작성

- 한·중은 8월 말 미·러는 10월 말, 일본은 여건이 조성되는 대 로, 북한은 10월 말까지 영변 핵시설 불능화 완료

o 동북아 평화·안보체제의 지도원칙 계속 논의 및 6자 외교장관회담 개최


2008년 7월 12일 합의에 앞서 북한은 6월 10일~11일 방북한 성 김(Sung Kim) 미 국무부한국과장에게 핵 프로그램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넘겨주고 26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핵 신고서를 제출하고 27일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이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의 해제 절차에 착수함으로써 제2단계 불능화가 제대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북한 핵 신고에 대한 검증 방법문제로 미·북한이 대립하였다. 

미국은 동년 10월 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기로 밝히면서 샘플링과 실증적으로 규명해 내는 과학적 절차의 이용에 관해서 합의하였다고 하였으나, 북한은 신고하지 않은 핵시설에 대하여는 상호 동의에 의하여 접근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11월 12일 북한은 검증 방법은 현장 방문, 문건 확인, 기술자들과의 인터뷰로 한정한다고하면서 시료채취를 거부하였고 12월 12일 미국은 대북중유지원을 중단하였다.  

북한은 2009년 1월 17일 전면대결태세 선언, 1월 30일 남북한 간 정치·군사 합의 무효화선언, 4월 5일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 4월 25일 ‘폐연료봉 재처리 시작’ 발표, 5월 25일 제2차 핵실험, 11월 11월 10일 대청해전,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4월 8일 금강산 남측 자산 동결,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으로 대남 위협과 동북아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2011년 들어 북한이 전방위 대화 공세를 하는 가운데 1월 19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미·중 정상 회담에서 양국은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 관리와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두 나라는 공동성명에서 진정성 있고 건설적인 남북대화가 필수적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북한의 우라늄 농축프로그램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조속 재개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를 배경으로 2월 8~9일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 군사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회담이 개최되었으나 회담의 의제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결렬되었다. 

4. 북한 핵무기 투발수단으로서의 미사일 개발과 제원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1969년~70년 사이에 소련이 1965년에 개발한 사정거리 68km의 단거리 전술미사일인 Frog-7을 지원 받음과 동시에 기술자들이 미사일 조립, 시험, 정비 훈련을 받아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되었다. 

1971년에는 중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중국미사일의 획득, 연구개발 기술 이전, 그리고 훈련까지 받았다. 1975년에는 소련제 Frog5-7을 역설계하고 1976년에는 1975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미사일 개발 계획(액체연료 추진에 의한 최대사거리 600km, 탄두중량 500kg의 동풍-61)에 참여하여 미사일 기술을 습득했다. 

북한이 원하던 SCUD 미사일 기술의 확보에는 이집트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63년 이집트와 국교를 맺은 북한은 1973년 10월에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MIG-21기 조종사 1개 중대를 파견하여 이집트를 돕고 1976년 이집트와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스라엘 공군기에 대적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제3국에 제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SCUD-B(사거리 280-300km, 탄두중량 985kg)를 도입한 이집트는 그 후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로 도입한 스커드 미사일의 수입 및 유지용 부속을 공급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독자적으로 미사일 개발을 하고 있던 북한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1976년부터 81년 사이에 이집트는 소련제 SCUD-B 미사일 2기와 발사대를 제공하고 북한은 이 미사일을 역설계하여 탄도미사일 개발을 전진시키는 결정적 전기를 맞이하였다.

1984년 4월 SCUD-B 미사일 최초 시험 발사한 이후 북한이 발사하고 작전 배치한 미사일제원은 다음과 같다.

구분 SCUD-B SCUD-C 노동 무수단 (IRBM)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사거리(km) 300 500 1,300 3,000이상 2,500 *3,750~6, 700이상
탄두중량(kg) 1,000 770 700 650 500 650~1,000 (추정)
비고

작전배치

작전배치 작전배치 작전배치

시험발사

개발 중

(이상 2010 국방백서 282쪽 * 부분은 랜드 연구소 추측)

현재 북한은 황해북도 신계군 이외 북한 전역에 SCUD-B/C 500여기를 작전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2호는 2010년 현재 50기 내지 70기를 생산,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북한에는 최소 4곳 이상의 미사일 제조공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고 SCUD-B의 생산 능력은 월 8-12기(연간 100기), SCUD-C의 생산능력은 월 4~8기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북한은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대포동 미사일 시험장과 비교하여 5배 넓이의 발사장, 1. 5배 높이의 발사대를 갖춘 제2 ICBM (대륙간 탄도탄 미사일) 발사 시험장을 중국에 근접한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인근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미국을 놀라게 하고 있다.

2002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2011년 1월경에 동창리 미사일 발사 기지가 완성된 것을 보면 북한이 남북한 간의 대화나 6자 회담 기간 중 또 미국에 유화 제스처를 보일 때도 계속 미사일 기지를 건설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 가능성과 예상 피해 평가


제임스 클레퍼(James R. Clapper) 미 국가정보국장은 2011년 2월 16일 상원 정보위에 출석하여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이 역내는 물론 역외까지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하면서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술이 상당 수준 발전하였다고 말하였다. 

로버트 게이츠 (Robert Gates) 미 국방장관은 2011년 1월 12일 북한이 2015년까지 소형 핵탄두를 탑재하여 미국 본토에 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2010년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이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 시기를 10년 내로 잡아왔다가 2011년에 들어와서는 5년 내로 대폭 앞당긴 것이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미사일은 전쟁 상태가 아닌 평시에도 한국에 정치 외교적 요구를 압박할 수 있는 전략무기이다. 또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는 미국을 위협하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수도권에 인구와 산업이 밀집한 한국을 군사적으로 충분히 위협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김정일은 남북한 간에 점점 벌어지고 있는 현격한 경제력 격차로 김일성 시대의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선제공격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인식하고 핵무기·미사일·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특수부대와 잠수함(정) 등 비대칭무기에 의한 속도전, 침투·국지도발로 대남군사전략을 전환하였다. 

제1차 북한 핵 위기에 즈음한 1993년 2월부터 3월 경 어느 날 김일성이 군 최고 간부들을 모아놓고 미국이 핵무기로 공격해 올 경우 어떻게 하겠는가 질문을 하자 당시 최고사령관이었던 김정일이 나서서 “조선이 없는 지구란 있을 수 없으며 원쑤들이 감히 핵 타격을 가해온다면 지구를 깨버리겠다는 것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결사의 의지이다”라고 답변하였다.(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 3대혁명 전시관 군사관의 김정일 어록) 

이런 김정일과 그를 계승한 수령 유일지배체제가 지속되는 한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기·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향후 재처리한 플루토늄으로 만든 핵폭탄으로 제3차 핵실험을 할 가능성도 있고, 2010년 11월 방북한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인 헤커박사(Siegfried S. Hecker)에게 보여준 영변의 1000여개의 원심분리기에서 생산한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들어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2008년 6월 26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한 핵 신고서에서 생성된 플루토늄 총량은 약 38. 5kg이며, 핵무기 제조에 사용한 플루토늄 양을 26Kg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북한이 2007년 현재 무기급 플루토늄 50kg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플루토늄 6kg에 핵 폭탄 1기 제조 가능 공식을 대입하면 북한은 최소 4기 내지 8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북한이 중국에 신고한 연도나 미국의 추정 연도가 2~3년 이상 경과되었고 매년 핵무기 1개씩을 만들 수 있는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를 보유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최대 10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 미국의 반핵단체 NRDC(천연자원보호협회: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가 미 국방부 산하 국방위협감소국(DTRA)의 컴퓨터 모델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의 핵사용 시나리오(Nuclear Use Scenarios on the Korean Peninsula)’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이 미사일, 폭격기 등 다양한 경로로 동시에 공습하여 단 한 개의

핵폭탄만이 폭격에 성공하는 것으로 가정한 핵 공격 피해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의 예상 피해는 다음과 같이 가공할 정도이다.(강정민·황일도, “미 NRDC의 한반도 핵폭격 시뮬레이션,”『신동아』, 2004. 12, 82-96쪽; http://docs.nrdc.org/nuclear/files/nuc_04101201a_239.pdf

국방부가 위치한 용산구 삼각지 상공 500m에서 15킬로톤 위력의 핵폭탄이 폭발했다고 가정할 경우 낙진에 의한 간접피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지만, 핵폭풍과 열, 초기방사선 등으로 인해 반경 1.8km 이내의 1차 직접피해 지역은 즉시 초토화되고 4.5km 이내의 2차 직접피해 지역은 반파(半破)) 이상의 피해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망자만 62만 명이 넘는다. 

용산구 삼각지의 100m 상공에서 15킬로톤 위력의 핵폭탄이 터져 비교적 방사능 낙진이 적은 경우 84만 명, 지면에서 폭발이 일어나 낙진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125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최악의 경우 서울 인구의 10%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연평도 포격처럼 결정만 하면 현재 작전 배치한 미사일로 한국 영토에 핵 공격을 할 가능성이 있다. 만일 황북 신계에서 SCUD-B를 발사할 경우 서울까지의 거리는 약 100km로서 도달 시간은 3분 40초(220초), 대전까지는 300km로서 약 5분14초(314초)가 소요되며 부산까지는 500km로서 6분 55초(415초)가 소요될 것이다. 

이 경우 단 한 개의 핵폭탄으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간 한국전쟁에서의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사, 부상과 실종·포로를 모두 합친 776,360명보다 훨씬 많은 가공한 피해를 몇 일내 입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6.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 대한 한국의 대책 

북한은 61년 전 공산화 통일을 위하여 무력남침을 하였고 1971년 8월 이후 한국과 대화를 하면서도 휴전선을 관통하는 남침용 땅굴을 팠다.  

1974년 IAEA에 가입, 1985년 NPT 가입, 1992년 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고 한국, 미국과 또 자신이 참가한 6자회담에서 각각 북한 핵 폐기에 대한 협상과 합의를 해 놓고도 뒤에서는 재처리를 통한 플루토늄 원자폭탄과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의한 원자폭탄을 만들고 세계를 위협할 미사일까지 개발하였다.  

한국은 머리 위에 핵폭탄을 이고 있으면서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북한의 선의만을 믿고 살 수가 없다. 냉정한 정세 판단을 바탕으로 하여 다각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먼저 남북대화, 6자회담 등 대화와 국제적 제재를 통해 평화적 해결을 적극 모색하여야 한다.

북한 핵의 직접 피해자는 한국이므로 지난 정부처럼 북한 핵 폐기문제를 미국에게만 맡기지 말고, 남북대화가 재개되면 북한 핵 폐기문제를 남북한 간의 교류·협력·지원과 연관시켜 남북한 당사자가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 

6자회담을 통한 북한 핵 포기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고 또 참가국들의 이해관계가 다양하고 책임회피가 가능하여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북한과 이루어진 북한 핵 관련 양자회담들과는 달리 북한에 다자적 압력을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국이 북한 핵 해결을 위하여 적극 참여하고 있는 이점이 있다.

국내외 정세 변화가 계기가 되어 남북한 간에 고조된 긴장이 완화되면 남북회담과 함께 6자회담을 재개하여 먼저 북한의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의 불법성을 제기, 북한 핵 폐기를 심도 있게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북한의 두 차례 핵실험에 대한 UN의 제재(UN 결의 1718호, 1874호)가 중국의 비협조로 실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앞으로 북한의 핵 보유가 중국과 북한의 발전에 ‘애물단지’가 되는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압력을 계속 가하여야 한다.

두 번째는 자위책을 증강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국 기정사실화와 북한 핵문제의 점진적 악화로 인한 전쟁과 같은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하여 북한의 핵무기 관련 활동을 감시하고 선제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군사적 체계를 갖추는 것과 동시에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 당국자와 국민의 일치단결된 결의 등 비군사적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전략정보 100%, 전술정보 70%를 미군에 의존하고 있는 현 상황을 개선할 수 있도록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북한의 핵무기, 미사일, 생화학무기, 장사정포, 특수부대, 잠수함(정) 등 비대칭 전력에 의한 각종 도발을 탐지·감시하는 장비와 실질적으로 억지 및 반격할 수 있는 전력을 증강해야 한다.

 구체적 방책으로 한국은 고고도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UAV), 공중조기경보기(AWACS) 등을 조기 도입하여 독자적 전략정보 획득 방법을 강구하고 국군 전력의 첨단화 추진과 함께 신뢰성 있는 응징보복용 탄도, 순항 미사일 개발·배치 등 고강도 억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 번째는 북한이 한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려 할 경우 선제공격 등 적시성 있는 미국의 핵 확장 억제 정책을 구체화하는 등 한미 연합태세를 강화하고 핵 확장 억제정책의 신뢰성과 실천성을 높이는 방편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재반입을 적극 논의해 나가야 한다.

2011년 들어 학계, 언론계와 국회에서 북한 핵에 대응하는 자위 수단으로 제기하고 있는 한국의 독자 핵 무장은 공포의 균형(balance by terror)으로 이론상 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있었던 대책이다. 또 한국은 기술, 재정적으로 핵 개발을 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핵 비확산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의 동의를 얻을 수 없고 한국이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 장기간 맞설 수 없는 개방형 통상국가임에 비추어 현실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렵다. 또 한국의 핵 무장은 일본, 대만에게로 확산되는 핵 도미노 현상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사서 이들 국가와의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은 1991년 9월 27일 조지 부시(George Bush) 미국 대통령의 해외 전술핵무기 폐기 선언과 동년 11월 8일 핵무기를 제조·보유·저장·배비(配備)·사용하지 않겠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 5원칙 선언에 따라 철수한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미국은 1958년부터 1991년까지 950기의 전술 핵무기를 배치했었다) 재배치에 대한 전략적 협의를 미국과 적극 추진하여야 한다. 그것은 2010년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합의된 확장억제정책위원회를 적극 가동함으로써 협의할 수 있을 것이다. 

대도시 전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수백kt 전략핵무기와는 달리 전술핵무기는 군사작전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하여 야포나 단거리 미사일 등으로 운반할 수 있는 통상 20kt 위력의 소형 핵무기이므로 대북 핵 억지력은 물론 남북대화나 6자회담에서 북한과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입지를 높여 줄 것이다.


미국의 전술핵무기 재반입 반대론자들은 미국이 수차례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였고 또 미국 본토나 해외 미군기지에서의 미사일로 하든 주한미군의 미사일로 반격하든 5분밖에 차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북한을 자극하고 중·러의 반발을 감수해 가면서 굳이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재반입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반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북한의 SCUD-B에 의한 서울 공격이 3분 40초 밖에 걸리지 않아 서울이 이미 초토화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북한 핵 무기가 대미협상용에 불과하며 북한이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또 설마 동족을 상대로 핵무기를 쓸 것인가 하는 안이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또한 한국은 2014년 시효가 끝나는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으로 일본이나 스위스처럼 미국의 사전 동의 없이 IAEA의 감시 하에 평화목적의 농축과 재처리를 할 수 있는 주권을 추구하고 한·미미사일 협정의 재개정으로 2001년 개정한 300km/500kg까지의 탄도미사일 개발 허용 제한을 풀어야 한다.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재배치, 우라늄 농축과 폐연료봉 재처리, 미사일의 사거리 연장 등은 이명박 정부와 이를 이을 한국 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방위협정 체결 제의 시와 같이 미국의 결단을 받아낼 각오를 해야 획득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는 한국의 생사와 존망이 달린 재앙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이 한국을 겨냥하지 않고 있고 또 통일이 되면 한국 것이 된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특히 북한 핵이 미국의 침공을 막아준다는 터무니없는 친북좌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어리석음도 버려야 한다. 전체 한국 국민이 깨어서 국가안보를 위하여 군사적으로, 비군사적으로 만전을 기하는지를 치열하게 비판하여 주권자가 할 몫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konas) 

송종환(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 이 글은 세종대 부설 세종연구원 발간 국가전략연구지 Global Affairs 2011년 봄(Spring)호에 게재된 내용으로 저자 양해로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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