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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

Written by. 최권삼   입력 : 2012-09-10 오전 10: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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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작전 배경과 최초 계획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작전으로 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상륙작전이다. 전쟁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위기를 타개하고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한다는 내용의 작전구상을 하였다. 이 계획은 맥아더 장군이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무렵 구상되었던 작전이었다. 즉 미 지상군을 수원부근에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려는 블루하트(Blue Heart)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은 북한군의 남진을 막지 못해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상륙작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맥아더 장군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이 작전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작전명 아래 인천상륙계획(100-B), 군산상륙계획(100-C), 주문진상륙계획(100-D) 등 3개 안을 작성하였고, 미 극동군사령부에서는 이중에서 인천상륙계획을 결정하였다.

 상륙지역 논쟁과 맥아더 장군의 강력한 의지

 맥아더 장군이 계획을 발전시키는 동안 미 합동참모본부는 공산군 후방에 상륙하겠다는 상륙작전계획 자체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동의하였지만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다. 미 합동참모본부의 반대의 핵심은 인천지역이 조수, 수로, 해안조건에서 상륙작전에 많은 제한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륙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상륙지역에 대한 의견대립이 계속되자 1950년 8월 23일, 동경에 있는 극동군사령부에서 미 육군참모총장 및 해군참모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상륙지역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극동군사령부 회의실에서 실시된 이 회의에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하였다.
 
 맥아더는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하려는 이유에 대해 “적은 그의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모두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되어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를 들어 서울을 신속히 탈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때 그는 지도를 가리키면서 인민군을 분쇄하는데 있어 제8군은 ‘망치’가  제10군단은 ‘모루’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결과 미 합동참모본부는 결국 8월 28일에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상륙작전 개시일을 1950년 9월 15일(D일)로 확정하였다.

 상륙기동부대 편성 및 기동

 상륙작전의 기본계획을 확정한 맥아더 장군은 즉각 상륙기동부대의 편성에 착수했다. 상륙기동부대사령관에 제7함대사령관인 스트러블 중장을 임명하고 그 예하에 제90공격기동부대, 제92기동부대를 포함하여 임무별로 모두 7개의 기동부대로 편성하였다.

 제90공격기동부대(사령관 도일 소장)는 상륙군 부대를 수송하고 해안교두보 확보 시까지 상륙군 부대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며, 상륙부대에 따른 해·공군의 근접항공지원과 함포지원을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92기동부대는 상륙군부대인 제10군단(군단장 알몬드 소장)으로 이루어진 조직으로서 예하에 미 제1해병사단(사단장 스미드 소장)과 미 제7보병사단장(사단장 바 소장), 국군 해병연대(사령관 신현준 대령), 국군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였다. 그와 같이 편성된 상륙군 병력은 총 7만여 명이었다.

 그리고 상륙기동부대는 미 해군함정을 비롯하여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함정을 포함, 총 260여척의 함정으로 편성되었으며, 한국해군에서도 초계함(PC) 4척과 소해정(YMS) 7척 등이 참전하였다.
 
 상륙작전을 위해 미 제7보병사단은 일본 요꼬하마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고베에서, 수송선단과 화력지원함대 및 지휘함 등은 사세보에서 각각 출항했다. 미 제5해병연대, 국군 해병연대와 국군 제17연대는 부산에서 인천으로 출항했다. 드디어 상륙 하루 전인 9월 14일 이들 부대들은 서해 중부해상의 집결지인 덕적도 근해에 집결을 완료했다.

 상륙작전 실시 및 인천시가지 소탕작전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 유엔해군은 서해안을 봉쇄하는 한편 상륙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해 방어선과 교통시설 등에 공중폭격을 실시하였다. 상륙작전일이 다가오자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를 제압할 필요에 따라 9월 4일부터 해병 항공기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출격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했다.

 9월 13일부터는 북한군의 반격능력을 분쇄하기 위한 각종 함포사격이 실시되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작전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양동작전이 감행되었는데, 9월 12일 한·미·영 혼성부대가 군산에 양동작전을 감행하였고, 동해안에서는 9월14일과 15일 양일간에 걸쳐, 삼척 일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는가 하면 영덕 남쪽 장사동에서는 9월 15일 새벽 해안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드디어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었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두보 확보였다. 제1단계 작전에서는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해군기가 상륙목표를 강타하고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함포사격을 집중하는 동안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가 06시 33분 최초로 월미도에 상륙하였다. 08시에는 월미도를 확보하고 섬 전반에 걸친 소탕작전은 정오쯤 완료하였다.
 
 제2단계 작전은 당일 오후에 시작되어 다음날 새벽에 종료되었는데, 미 제5해병연대와 미 제1해병연대가 투입되어 해두보를 완전히 확보했다. 그들은 곧 인천 시가지 작전을 전개했으며, 그동안 해병 항공기가 시내를 폭격하고, 해군기는 인천 부근을 중심으로 차단공격을 감행했다. 동시에 함포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모든 목표에 대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인천 시가지를 장악한 상륙부대들은 시가지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이 작전은 국군 해병대가 담당하였다. 인천시가지 중앙을 통과하는 경인선 철도를 기준으로 남쪽지역은 제3대대가, 북쪽지역은 제1대대가 분담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제3대대가 담당한 지역은 응봉산 일대와 시가 중심지였다.

 상륙작전 시 항공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살아남은 북한군의 대부분은 서울지역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였으나 도주의 기회를 놓친 상당수가 민간인으로 변장하여 주택가에 숨어 있었다. 이들은 소탕작전 중 많은 수가 애국시민의 신고로 생포되었으며, 일부는 전의를 잃고 자진투항하였으나 일부는 저항 또는 도주를 시도하다가 사살되기도 하였다.

 이날 오후 소탕작전은 거의 종료되었고, 연대는 시내의 주요 공공시설을 장악하고 야간에는 시내 외 요소요소에 대한 경비와 순찰을 강화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결과와 맥아더 장군의 명성

 인천상륙작전의 기습적인 일격으로 전세는 급전환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에 쫓긴 북한군은 완전히 지리멸렬되었다. 실제 낙동강 전선으로부터의 추격과 인천-서울지역에서의 포위를 벗어나 북으로 도주할 수 있었던 북한군은 소수로 추산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전반적 성과는 다음과 같은 3개항으로 분석될 수 있는데, 첫째 적에게 결정적인 위협이 된 인천상륙작전은 직접적으로 낙동강 전선의 공산군을 급속히 와해시켰다.

 둘째,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공산군의 전 병참선이 차단되어, 공산군의 참패가 초래되었다.

 셋째, 성공적으로 완수된 작전에 의해서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이 북진작전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룬 최대의 성과는 낙동강방어선에서 단순히 총반격하여 38선으로 올라갔을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불과 10일만의 전투로 서울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아군 병력 14만 명과 국민 200여만 명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인천상륙작전 개시 전의 상륙지역 선정에 대한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 장군의 개인적인 명성은 더욱 더 높아졌다.(Konas)

최권삼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국보법개정서명바로가기 : http://konas.net/event/signatur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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