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안보뉴스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인쇄

“毛澤東의 실수 덕분에 한국이 살아날 수 있었다”

趙甲濟 기자의 부산 月例 강좌 <6·25전쟁의 세계사적 의미>란 주제로 열려
Written by. 조갑제닷컴   입력 : 2015-06-29 오후 12:56:49
공유:
소셜댓글 : 0
facebook

  “한국전쟁은 동서냉전의 본격적 개막을 알리는 동시에 공산권의 패배를 예약하는 사건”

 ‘趙甲濟 기자의 부산 月例 강좌’가 6월27일 오후 부산시 동구 부산일보사 대강당에서 약 3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6·25전쟁의 세계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열렸다.

 ‘趙甲濟 기자의 부산 月例 강좌’가 6월27일 오후 부산시 동구 부산일보사 대강당에서 약 3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6·25전쟁의 세계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열렸다.

 6월24일 KBS 뉴스가 보도한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 사실이었다!>에 대해 趙甲濟 대표는 “6·25전쟁 65주년을 맞아 의도적으로 내놓은 악랄한 誤報(오보)”라고 비판했다. 趙 대표는 “일본 정부의 공식 서류도 아닌 일개 縣(현)의 역사책 내용만을 바탕으로 확정된 내용인 것처럼 보도했다”면서 “이를 문제 삼지 않으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公營(공영) 방송에 선동의 면허를 부여하는 것이니 KBS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趙甲濟 기자는 6·25전쟁이라는 명칭에 대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는 국가 간의 무력 충돌을 의미하는 ‘전쟁’이라는 용어 대신 ‘事變(사변)’, ‘動亂(동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6·25전쟁이라는 용어로 굳어졌고, 국제적으로는 ‘Korean War’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6·25 南侵(남침) 전쟁은 20세기 3大 전쟁에 속한다”고 했다. 20세기의 3大 전쟁으로는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6·25전쟁이 있으며 기준은 전사자 수와 전쟁이 끼친 영향으로 판단한다.

 제1차세계대전은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등 帝國主義(제국주의)가 사라지는 결과를 만들었고, 제2차세계대전은 나치즘과 파쇼,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을 이끌었다. 동시에 2차 대전을 통해 공산국가 소련이 强國(강국)으로 성장해 美蘇의 냉전이 시작됐다.

 趙甲濟 대표는 “6·25 남침에는 毛澤東(모택동)의 중국 공산 통일이 영향을 미쳤다”면서 “중국이 공산화돼 공산 진영에 유리한 여건이 만들어지자 金日成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저지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도 신속한 파병 결정으로 남침 발발 10일 만에 美軍이 한반도에서 전투를 치르게 됐다고 했다.

 趙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勝氣(승기)를 잡은 연합군이 北進(북진)을 계속해 ‘크리스마스(12월25일)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맥아더가 ‘中共軍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誤判(오판)해 12월에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 병력도 6만 명 수준으로 오판했다”면서 “실제 30만 명의 중공군이 개입했다”고 덧붙였다.

 많은 수의 병력만을 重視(중시)하는 전술로 알고 있는 중공군의 人海戰術(인해전술)에 대해 趙 기자는 “당시 중공군과 인민군을 합한 병력과 연합군과 국군을 합친 병력은 각각 35만 명 수준으로 같았고, 화력은 연합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중공군의 전략과 기동이 훌륭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중공군은 기습의 효과를 내기 위해 주로 야간 기동과 우회를 통한 배후 공격을 활용했다. 중공군의 南進(남진)으로 北上(북상)하던 국군의 2군단 예하 7·8사단과 美2사단이 큰 피해를 보았다.

 趙甲濟 대표는 “중공군이 남진하자 맥아더는 병력 총퇴각을 지시했고, 美행정부에는 ‘한국을 포기해 일본만 지키든지 아니면 중국을 폭격할 것’을 요구했으나 트루먼 행정부로서는 모두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면서 “1950년 1월, 당시에는 맥아더가 한국 포기를 열렬히 주장했고 이를 막는 사람이 트루먼과 애치슨 국무장관이었다”고 설명했다. 趙 대표는 1951년 1월 13일 UN 총회에서 미국이 휴전안에 동의하고, 이를 중국에 제안했으나 오히려 모택동이 휴전안을 거부하면서 한국이 살아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휴전안은 당시 戰線(전선)인 평택-영월-삼척 線(선)을 기준으로 휴전하고, 휴전 후 4大國(美·英·中共·蘇) 회의를 통해 대만 문제를 논의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대만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다.

 이 당시 국제 사회가 한국에 불리하게 전개된 이유는 한국으로 파병된 해외 주둔 미군 때문에 유럽 안보에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유럽에는 미군이 14개 사단만 남아 있었다. 소련은 130개의 사단을 자국에 보유하고 동독에만 20개의 사단을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이를 계기로 戰犯國(전범국) 독일의 再무장화가 이뤄졌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군사동맹체제로 강화돼 유럽을 방어하는 핵심 기구가 됐다.

 趙 대표는 “UN이 제시한 휴전안을 모택동이 거부한 것은 전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면서 “모택동도 맥아더와 같이 오판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모택동의 실수 덕분에 한국이 살아날 수 있었다”면서 “워커 8군사령관의 후임으로 온 리지웨이 장군이 서울을 再수복하면서 오늘날의 휴전선 근방의 남북 경계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후 모택동 측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휴전 협상을 제의해 왔다.

 趙甲濟 기자는 “한국전쟁은 동서냉전의 본격적 개막을 알리는 동시에 공산권의 패배를 예약하는 사건”이라면서 국내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에서의 6·25 남침 전쟁을 분석했다. 趙 기자는 “국내적으로 6·25를 통해 反共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한미동맹의 토대가 마련돼 대한민국이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국제적으로는 美7함대 대만 해협 파견으로 중국의 대만 상륙 저지, 미국의 군비 증강, 중국과 북한의 경제적 고립, 戰犯國 독일의 再무장, 전쟁 특수로 인한 일본의 경제 부흥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趙甲濟 대표는 “스탈린·毛澤東은 역사적 패배자가 됐고, 李承晩·트루먼은 역사적 승자임에도 아직 한반도에서는 6·25가 끝나지 않아 올바른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통일이 돼야 6·25가 끝나고, 6·25가 끝내야 냉전이 종식된다”면서 “통일은 자유통일과 적화통일 중 하나가 될 것이고, 북핵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통일 방식도 결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 부산 월례 강좌는 7월 25일 오후 2시 부산일보사(부산시 동구 수정동) 10층 대강당에서 <中東의 종교 전쟁>이라는 주제로 열릴 예정이다.

조갑제닷컴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2026.9.29 화요일
안보칼럼 더보기
[안보칼럼] 북한의 드론 전력 위협에 대비한  민·관·군 입체적 대응 방안
한반도 안보 지형의 지각변동최근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첨단 ..
포토뉴스 더보기
핫클릭 뉴스
깜짝뉴스 더보기
베트남에 북한군 참전 기념물 설치…北국방성, 제막식 참석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북한 인민군 참전 군인들을 기리는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