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의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승인은 기적”
“건국 4개월의 신생 대한민국이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 받은 것은 기적과 같은 축복이다.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 투쟁에서 북한을 꺾고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을 이끌어낸 호국의 토대가 되었다.”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바른사회시민회의(이하 바른사회)가 주최한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대한민국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 주제의 토론회에서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12일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을 얻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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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9일 오후 열린 토론회에서 허 교수는 “민족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을 지고의 가치로 하는 통일지상주의사관을 견지하는 한국사학계는 1946년 6월3일 이승만의 정읍연설을 근거로 분단 고착화의 주된 책임을 대한민국 건국세력에게 묻고 있지만,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지령이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인 1945년 9월 20일 내려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은 남북통일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분단이 고착화 된 시기는 19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런던 외상회의’였으며, 결정적인 요인은 1946년부터 1948년 사이 벌어진 중국 내전”이라며, “소련이 북한을 중국 공산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함으로써 (분단은)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이어 “이후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위해 북한으로 향한 김구의 행보는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소련의 정치공작에 성공을, 대한민국 건국사에는 큰 상처를 남겼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또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前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토대를 닦고 1948년 2월8일에는 조선인민군을 창군, 이틀 뒤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되는 등 북한의 단정 수립준비가 끝났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이승만이 정권욕 때문에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섰다고 본 수정주의 해석을 비판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확고한 우방이 없었으며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현상을 유지하려 한 ‘관망정책’이었음을 들어,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임을 인정받도록 하는 것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건국외교 활동의 내용이었다”는 것이 허 교수의 주장이다.
더욱이 “제3차 유엔총회에 파견된 대표단은 전문적으로 훈련된 외교관이 아니었고, 유엔회원국이 아니었던 대표단은 옵저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어 교섭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난 외교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으며,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정국과 국론분열, 소련대표를 비롯한 공산진영의 고의적인 지연작전으로 안건 상정이 지연되는 등 장애요인이 많았음에도 대한민국의 승인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력으로 일궈진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과 국제 외교무대에 영향력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끌어낸 점, 덜레스(John Foster Dulles)를 위시한 미국의 지원, 그리고 바티칸과 미국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인도와 아랍진영의 지지를 이끌어낸 대표단의 헌신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점을 들어 허 교수는 “남북분단은 민족내부의 분열보다는 외부의 영향이 크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한 남북분단을 주도했고, 정권욕 때문에 단정수립에 앞장섰다는 이승만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은 6·25 전쟁 전까지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있었다는 점 등에 미루어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박흥순 선문대 교수는 토론에서 “유엔 승인외교가 비교적 신속하게 성공한 것은 당시 한국의 미약한 국력 및 국제적 위상, 열악한 외교역량, 남한 내에서의 정치, 안보적 불안, 남북한의 분단과 갈등, 그리고 한반도 당사국 및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소련의 견제 및 반대 등에 비추어 볼때 매우 역사적인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유엔의 승인이 가져온 의미는 한국이 주권확보와 자립을 마련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당시 2차 대전 직후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 시기에 유엔 자체의 정치적, 도덕적 권위와 유엔총회의 압도적 지지, 그리고 지속적 원조 등의 기여는 이후 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또 “유엔의 입장에서도 대한민국 총선거와 건국 과정은 기념비적 임무였으며 이와 같은 역할로 유엔의 권위와 정당성을 발휘하는 계기로 창설 초기 유엔의 발전에도 기여했다”며, “탈 냉전시대 유엔이 각종 평화활동 (Peace Operations)을 전개하는 가운데, 선거감시 옵저버 활동 등을 통해 분쟁해결 및 정부수립 등 평화유지 (peace-keeping) 혹은 평화구축 (peace-building) 활동을 일반화한 점에서 한국의 사례는 매우 효시적인 유엔의 평화활동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지수 명지대 교수는 “북한은 한반도 전체 사회주의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다”며, “2차 대전 후 소련군 점령지에서 ‘공산당’들이 ‘노동자당’ 또는 ‘노동당’으로 획일적으로 개명해 연립정권 구성에 참여하고, 주도권 장악이 완료됐다고 판단된 시점에 다시 ‘공산당’으로 돌아간 점 등을 판단할 때 조선‘노동당’이 조선‘공산당’으로 돌아가지 않음은 아직도 그들이 통일전선전술을 유효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유엔의 승인을 받은 역사적 경험은 이후 한반도 통일과정에도 참고가 될 수 있다”며, “유사시 UN 안전보장이사회가 UNTA를 구성해 최소 5년 이상 북한을 통치하되, UNTA 체제의 종료 시점에서 북한 주민이 최소 7개 공역 지자체를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고 구상했다.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는 “대한민국은 국제정치와 국제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은 나라로, 건국 또한 일국사적 관점이 아니라 국제사적 시각으로 봐야 하며,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과정적 진행형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2차대전 이후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 전개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판단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 정치 지도자들이 잘못된 정세판단을 했는데 불행히도 김구와 김규식이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승만에 대해서는 “미국과의 견해와 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립과 건국에서 끝까지 한국인의 목표인 한국민족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배타적 민족주의자였고, 그 과정 중에 미국 국무성과 충돌해 기피인물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며, 이승만이 결코 미국의 앞잡이가 이니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바른사회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근현대사 속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되새겨 보기 위해 마련한 연속토론회 첫 번째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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