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의 1인 남강 이승훈 선생 기려
일제치하 암흑의 시대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의 조국 독립을 위한 불굴의 의기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교육을 통해 민족의 내일을 개척하려 한 남강 이승훈 선생을 기리는 행사가 지난달 27일 선생이 설립한 서울 용산구 소재 오산고등학교에서 열렸다.
평안북도 정주 군민회 제71회 정기총회가 열린 오산고등학교 대강당에는 선생의 민족사랑, 애국 애민사랑을 기리는 이 지역 출신 원로들과 후학들이 참석해 선생의 위훈을 기리고 나라사랑의식을 다졌다.
임왕식 정주 군민회장을 비롯해 김상연 군민회 원로회장, 백영철 평북중앙도민회장, 김영철 평북 도지사, 오산학원 김동희 이사장과 오산 중․고등학교 교장, 전제현 유격백마부대기념사업회 이사장, 최성룡 KLO8240 백마부대 회장 등이 참석해 민족얼을 통해 깨우침에 앞장선 남강 선생을 기림과 함께 정주군민회 회원들의 단결과 화합의 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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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임왕식 정주군민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승훈 선생의 생애를 되새겼다. 임 회장은 “오산학교는 정주의 상징이며, 정신적 지주이자 정주인의 무한한 자부심이기도 하다”며 “110년 전인 1907년 우리 고향 정부에 오산학교를 설립해 독립운동과 조국 근대화에 앞장선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고 돌이킨 뒤 “우리 정주군민은 오산의 민족정신을 잊지 않고 몸소 실천해 실향민 사회에서 제일가는 군민회로 발전했다”고 자긍심을 일깨웠다.
임 회장은 “오산의 정신은 앞으로도 2세, 3세에게 전해져 국가발전과 사회통합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오산 정신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는 이어 6․25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진 오늘의 이산 현실 상황을 적시한 뒤 “북에 남겨놓고 온 누나와 동생들의 모습조차 이제는 낡은 사진처럼 희미해져가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메어지곤 한다”며 목이 메인 채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고령자가 된 우리에게 남북이 통 크게 고향방문의 기회를 주어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늘 말하는 한을 풀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 본다”고 이산가족들의 한과 현실을 대변했다.
이어 김상연 군민 원로회 회장은 축사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한분 두분 세상을 등지는 원로 회원들의 소식을 전해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총회에 참석하러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몇 분이나 나오실까 우려와 기대를 갖곤 한다”며 “벌써 군민회도 나이가 70을 넘겼으니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면서 “시간은 이리도 빨리 지나가고 살아 있는 우리 1세대 분들은 하루하루가 힘겨워져만 가는데 고향에 가는 날은 언제일는지 참으로 가슴이 메어진다”며 좌중을 돌아봤다.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 절대 포기하지 말고 건강하게 고향 가는 날을 기다리면서 힘차게 살아가자”고 분위기를 바꾸는 희망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 날 행사는 국민의례에 이어 명예군민증 수여, 공로자에 대한 선물 증정, 인사말과 격려사, 축사, 만세삼창과 이어진 오찬 순으로 진행했다.
또 정주군민 2세인 최성룡 KLO8240 백마부대회장은 2세로서 겪는 또 다른 아픔과 애환을 토로했다. 최 회장은 "6.25전쟁 당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고 할 때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 되새기며 다시는 이 땅에서 그런 비극이 재연되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며 "지금도 6.25때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싸우다 포로가 되신 국군포로, 납북자, 전쟁이후 납북된 분들에 대한 생사가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그 가족들은 하루하루가 고통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이산가족의 아픔을 대변했다.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이기도 한 최 회장은 현 정부에 대해서도 "정부가 새로 들어서 북한과의 인도주의적 접촉을 허용하고 있는데 북한에 대해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하고 밝힐 것은 밝혀 납북자 가족들이 하루속히 북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 확인과 만남이 성사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남강 이승훈 선생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에는 기업가로서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민족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선생은 안창호 선생이 만든 비밀 조직인 신민회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리고 민족의 힘을 기르려면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 평안북도 정주에 신식 학교인 오산 학교를 세웠다.
1911년에 일제가 105인 사건을 일으켰을 때 그도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105인 사건이란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죄목을 씌워 신민회 간부와 민족 운동가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감옥에 가둔 사건을 뜻한다. 이승훈은 이때 일제의 재판부로부터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15년에 감옥에서 풀려난 뒤 오산 학교와 교회 일에 전념하던 그는 1919년에 기독교계의 대표로서 3 · 1 운동을 계획했다. 그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고, 이 일로 인해 다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193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육 운동과 물산 장려 운동 등 민족 운동에 온 힘을 쏟았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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