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공식채택 무엇이 문제인가?
정부는 소위 '4.3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작성한 조건부 보고서에 지난 6개월간 20여개의 기관과 단체 및 개인으로부터 접수받은 수정의견 376건 가운데 33건만을 반영한 수정보고서를 10월15일 공식 채택했다. 그러나 이 수정보고서는 핵심내용에 있어서 지난 2월29일에 작성됐던 당초보고서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점에서 향후 엄청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보고서는 공산당의 시각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소위 '4.3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6개월 전에 작성했던 보고서 원본(지난 3월 31일자 조선일보(A8면)에 게재)에 정기승(鄭起勝변호사(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회장)등의 논지를 곁들여 잘못된 점을 짚어본다.
'민중항쟁' '양민학살'은 공산당 시각
당시 제주도를 유혈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1948년 4월3일 한라산 정상과 주요 오름(봉우리)에서 일제히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제주도 인민군총사령관) 김달삼이 지휘하는 350여명의 무장폭도들이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무장폭도들은 경찰뿐만 아니라 좌익세력에 대항하던 우익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함으로써 제주도를 유혈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었다.
공산무장폭도 수괴 김달삼은 북한에서 영웅이 되어있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나타나 자신들의 투쟁성과를 지서습격 31회, 야외접전 15회, 경관·우익인사 살해 5백여명, 도로파괴 79개소, 전선절단 893개소 등으로 보고하여 영웅이 되었다. 그는 사후 북한 혁명열사 능에 묻혔다. 김달삼이 보고한 그들의 투쟁성과는 곧 대한민국의 피해인 것이다.
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사전에 무산시키려 한 사건이다 1948년 4월10일 인민해방군 제5연대 명의의 포고문에는 당시 공산무장폭도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들은 무장투쟁의 목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설립이라고 밝히고 이에 협력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로 숙청된다고 주민들을 협박했다. 이로 인해 당시 제주도에서는 정부수립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는 치러지지 못했다.
이번 정부의 4·3사건 진상보고서 공식채택으로 대한민국 건국을 파탄내려던 공산폭도들은 희생자가 되어 명예회복이 될 것이고 대통령의 공식사과까지도 예정되어있다고 한다. 그럴 경우 폭도들에게 죽은 원혼들은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다.
물론 진압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은 당연히 명예가 회복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이유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명예회복은 진정한 의미의 희생자에 한해야 하는데도 이번 결정으로 살인·방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폭도들까지 희생자로 만들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2001년 9월27일 제주 4·3 특별법 헌법소원에 대한 결정문에서 4·3사건 희생자 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할 대상으로 ①수괴급 공산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 간부 ②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③무장 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제헌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④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 등 폭동행위에 적극 가담한 자라고 명시한 바 있다. 하지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무시한 채 ③④까지 희생자로 보아 명예회복 대상자로 만들려 했다.
대한민국 정사(正史)에는 공산당의 폭동'
진상조사보고서는 살인자를 희생자로 부상시키는 과정에서 '4·3위원회'의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의 보고서(초안)에서부터 4·3사건의 직접적 원인인 남로당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배후조종은 외면한 채 '무장폭동의 불가피성과 군경의 과잉진압'을 전제로 한 가설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또 사건의 원인·진행과정·피해상황 등을 현장조사와 기록 및 증언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규명해야 하는데도 객관성이 입증되지 않은 4·3 관련 편향된 저술들이나 자의적인 개인들의 주장을 검증과정 없이 수용하여 과잉진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심지어 사실을 왜곡했다는 평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나종삼(羅鍾三) 전문위원 등 '4·3위원회'에서 탈퇴를 선언한 위원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평가는 선거공약사항이 아니며, 특정 정부의 몫일 수도 없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평가에 맡겨두어야 할 일일 뿐,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평가를 시한에 쫓겨 문제점을 도외시한 채 마무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다수의 전문가들을 동참시켜 충실하고 완벽한 진상조사보고서를 내도록 해야 한다. 역사는 올바르게 평가되어야 그 역사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상보고서는 조직적이고도 치밀히 계획된 1948년 4월 3일의 제주폭동의 원인을 거두절미하고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3.1절 발포사건]이「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사태를 단순화함으로써 사건전체가 의도적으로 진상과는 전혀 다르게 왜곡되어있는 것이다.
대구폭동(1946.10.1)과 제주폭동사건(1948.4.3)의 공통된 특징의 하나는 공산당이 군중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습격케 함으로써 중과부적의 경찰로 하여금 자위수단으로 발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사상자를 내게 하는 수법을 가용했다는 점이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또 하나의 다른 특징은 기존 기구의 구성원을 무작정 '친일파' 또는 '부패행위자'로 몰아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제주4·3사건 보고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보고서는 "일제치하 경찰의 군정(軍政)경찰로의 변신과 군정관리의 모리(謀利)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민중의 시위가 불가피했으며, 경찰이 무고한 시위군중에게 발포함으로써 민중을 분노케 하여 폭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당국의 진압이 경찰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어 강공정책을 폈다"면서 공산당의 세포조직이 군중들 속에 섞여서 군중을 조직적으로 선동한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당시 군중 속에 섞여있던 공산당 세포들은 단상에 뛰어올라가 '인민공화국 만세'를 선도했고, 관공서에 불을 지르고 그 가족들을 무차별 살해하는 데에도 앞장섰던 것이다.
이러한 조직적 불법집단의 무장살인행위는 전혀 문제삼지 않은 채, 군경의 대응이 심했으며,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결과만을 부풀려 사건의 성격을 '공산당의 조직적 폭동'이 아닌, '민중의 자연발생적 항거'로 규정하고 있어 문제인 것이다.
폭동을 일으키면서까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극렬하게 반대한 이 사건을 정통 대한민국 정부의 총리(高建)가 공식문서로 채택했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 정통성을 부인하거나 대한민국을 말살·소멸하려는 불순세력에게 놀아났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무장폭동'과 '무장봉기'는 다르다
이 보고서는 “48년 4월 3일 오전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고 표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당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실시되려던 단군이래 최초의 민주선거를 추진하던 미군정과 민족진영을 [악]으로 규정하고 마치 그 [악]을 타도하기 위한 [정당한 무장봉기]처럼 인식케 하는 불씨를 남겨놓고 있다.
그 부연설명이 더욱 가관이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西靑·서북청년회·해방후 공산주의를 피해 이북에서 월남한 서북청년들의 모임)의 탄압중지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고 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주장들이 옳은 것처럼 인식시키려 하고 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폭도나 무장공비로 인식돼온 자들을 [무장대]로 표현하고, '마을주민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 이 보고서는 기술하고 있다.
9.11집단테러로 수천명의 무고한 미국인을 죽인 테러리스트나 이들을 지원하는 자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린 미국대통령 부시와 마찬가지로 당시 '민족주의자'의 탈을 쓰고 테러를 자행하는 공산폭도들을 지원하거나 협조했다면 이들은 진압경찰이나 군부대에게는 적일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폭동자와 그 협조자를 양민으로, 진압자를 무작정 역도(逆徒)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공산당조직은 오랜 왕조와 일제의 질곡(桎梏)으로 응어리진 한국인의 생래적인 반항의식을 악용한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고루한 왕조와 악덕 외세의 억압을 극복하고 정보화시대의 기술선진국대열에 진입했다. 공산당이 악용해온 구태의연한 사이비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근대국가 형성에 전력을 경주해야 할 때인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갈라놓는 공산당의 [증오의 철학]을 언제까지 원용할 것인가?
군경의 희생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제주 4·3사건 직후인 1948년 5월4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한데 이어 열흘 뒤인 5월14일에는 정오를 기해 대남 송전을 중단시켰다. 이렇듯 북한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 찬성→ 유엔위원단의 입북거절→ 남조선 총선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대한민국건국반대 파괴활동을 벌이면서 실질적인 단독정권을 먼저 만들었다.
당시 소련은 민족지도자 조만식(曺晩植)에게 정권을 만들어 주는 척 하다 조만식이 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자 그를 가두고서 소련군 대위 김성주(金聖株)를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전면에 내세웠다. '김일성'은 그 후 소련의 충실한 꼭두각시가 되어 반대자·비판자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정권을 유지했다.
이에 비해 평생을 민주주의와 개혁과 독립을 위해 몸바쳐온 이승만은 신탁통치 등에 있어서 소련과의 합의를 위해 힘쓰던 미국과의 반목 속에서, 그리고 그를 제거하려 음모를 꾸며온 공산당 세력과 그를 시기해온 한독당 세력의 온갖 폭동과 폭력을 물리치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경쟁시장주의의 씨를 뿌렸다.
당시 이승만을 반대하는 공산당은 남한 내 335개의 선거사무소를 습격했고, 697회의 테러를 자행했으며, 경찰관 249명과 그 가족 25명 및 선거공무원 82명을 살상하는 등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고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대한민국사(大韓民國史)]의 일지가 밝히고 있다. 정부가 이를 뒤엎고 제주의 일부언론인의 부정확한 자료 등을 바탕으로 작성된 기록을 일부 시민단체의 편향된 '감수'를 받아 공식 채택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제주 4·3사태는 공산당의 반체제폭동이었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좌경적(左傾的)시각으로 왜곡하려는 반(反)시대적 역풍을 바로잡아야 한다. ***









![[안보칼럼] 북한의 드론 전력 위협에 대비한 민·관·군 입체적 대응 방안](/img_data/article/260923/260923_6300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