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기념] (2) 강우규 의사 동상
하루에도 많은 시민이 오가는 (옛) 서울역 광장, 그곳에 한 노인의 동상이 있다. 바쁜 일상을 사는 시민들은 이 동상을 지나쳐가지만, 동상의 노인은 오른손에 수류탄을 꽉 쥔 채 우두커니 서 있다. 노인의 이름은 ‘강우규(1855.7.14. ~ 1920.11.29.)’.
|
가난한 농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는 청소년 시절 본인의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다. 그러나 이후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개화사상을 주창하였고, 장로교를 믿게 되었다. 전통을 중시하는 집안 어른들은 기독교 신자가 되겠다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강 의사는 이주 후 그곳에서 청소년기에 배운 것을 살려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계몽운동에 투신하다
그는 한약방 운영으로 자산가 반열에 올랐으나, 모은 돈으로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선생은 이를 통해 백성들이 새로운 학문을 익히게 되고, 민족정기가 세워지기를 바란 것이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위해선 백성들을 계몽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라는 결국 경술국치로 쓰러졌고, 1911년 왈우 선생은 두만강을 건너 망명하였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오가며 이동휘, 박은식을 만나 독립운동을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그 방법을 찾아 나갔다. 러시아가 일제의 눈치를 살피며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을 억누르자 선생은 그곳을 떠나 길림성 지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지역에서 그는 우리 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을 건설하였다. 불가피하게 이주했으나 국민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왈우 선생의 의지와 신념은 꺾이지 않아 광동학교와 교회를 설립했다. 민족의식을 강조했던 그는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이 설립한 광동학교 학생들과 우리 동포들을 모아 독립을 선포하였다.
愛國心 가득한 노인의 패기
그는 3.1운동과 같이 백성들이 나서서 저항하는 것도 물론 큰 의의가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 생각한 것인지 더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마치 청년 같은 포부를 가졌던 그. 결심 후 그는 본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이동휘 선생이 머물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한 그의 목표는 ‘조선 총독 암살’이었다. 일제에 걸리지 않기 위해 다리 사이에 폭탄을 차고 들어왔고, 신문에 나온 사이토 마코토 당시 총독 사진을 보고 이를 오린 후 가지고 다니면서 그의 얼굴을 익혔다. 그의 계획은 허술한 면 없이 대단히 치밀했다.
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탄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안타깝게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의거는 우리 민족이 가진 조국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열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실패했지만 결국 성공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일제에 항거한 애국 투사는 많았지만, 총독을 처단하고자 했던 의열투쟁은 ‘노인 강우규’가 처음이었다. 그의 의거는 약산의 의열단, 백범의 한인애국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노인의 이 같은 담대함과 애국심에 많은 대한의 청장년들은 감복하였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의 순국 후 이 땅은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왈우 선생은 구(舊)서울역 광장에 영원히 동상으로 남아 조국독립을 이루어내고 변화무쌍해진 서울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총칼을 든 협박에 맥없이 국권을 헌납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속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애국심을 품고 총독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던 그가 동상으로나마 선진국이 된 한국을 바라보며 얼마나 뿌듯해할까 생각해본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전대호










![[안보칼럼] 강한 국군이 곧 평화의 조건이다](/img_data/article/260930/260930_63035.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