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기념] (11) 호국영웅 김홍일 장군, 손원일 제독
2025년은 한국전쟁이 발발(勃發)한 지 75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는 자랑스럽게도 강대국 사이에서 끌려다녀야만 했던 상황에서 100년도 채 걸리지 않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같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는 75년 전의 희생과 헌신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후손으로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호국영웅들에게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을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필자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대학생 기자단으로서 이제부터 필자만의 방식으로 영웅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김홍일 장군- 항일, 반공에서 반독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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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전쟁기념관 안에는 우리 역사 속 나라를 지켰던 영웅들의 흉상이 곳곳에 놓여있다. 김홍일 장군(1898-1980)의 흉상 역시 전쟁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김홍일 장군은 독립운동과 6.25 전쟁, 그리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기까지 이견 없는 애국자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 그의 시작은 항일 독립 투쟁이었다. 본래 교사였던 그는 일제의 모진 핍박으로 인해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직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간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위한 폭탄을 제조하는 데에 있어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김홍일 장군은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취임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미국의 전략정보국(OSS)와 힘을 합쳐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한국광복군으로서의 활약은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조국광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졌던 한국전쟁에서 그의 공적은 빛을 발하였다.
6 · 25전쟁 발발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이었던 그의 현명한 판단으로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7일이나 버티는 등 우리 군이 적에 반격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그는 육군 제1군단장으로서 평택지구에서 포항탈환작전에 이르기까지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 육군종합학교 총장을 맡아 군 간부 양성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손원일 제독-대를 이은 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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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를 꼽자면 단연 손원일 제독(1909-1980)일 것이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장자로 태어난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지금의 강인한 대한민국 해군은 손원일 제독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말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조국광복 이후 해방병단(대한민국 해군 전신)을 창설하였던 손원일 제독, 그가 창설하였던 해방병단은 이후 해안경비대로 이름이 바뀌어 손 제독은 이곳의 총사령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해군참모총장으로서 6.25 전쟁 당시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승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후 손원일 제독은 국방부 장관과 주서독 대사직을 수행하며 각 방면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렇듯 화려한 명성의 손원일 제독이 유일하게 갖지 않은 타이틀이 하나 있다. 그것은‘해군 최초의 대장’이다. 손원일 제독이 국가와 해군에 기여한 공로만 봐도 그의 대장 진급은 명약관화였으나, 함선이 한 척도 없는 해군의 대장직을 맡으면 조소를 당한다며 진급을 고사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한 두 장군 모두 중장에서 자신의 군 생활을 마쳤다. 그러나 그들이 나라와 우리 군에 남긴 것은 여느 대장보다 더 크다는 것이 틀림없다. 이들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이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하는 것이 호국보훈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전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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