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대학생 국토대장정] 소감문(1) 기억은 저절로 지속되지 않는다.
(이 글은 '제16회 향군 대학생 국토대장정' 소감문 우수작으로 선정된 글 입니다.)
1. 들어가며
언제나 전쟁과 분단은 일상의 근처에 부유하는 단어였다. 실향민이신 조부모님의 깊은 슬픔 속에서, 그리고 국가와 가족의 역사에 아른거리는 참전의 기억 속에서 전쟁이란 교과서 너머의 실체로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20대 청년으로서, 정작 대한민국 안보의 최전선이 어떤 무게를 견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국민의 절반이 청춘의 한 시절을 바쳐 지키는 나라에서, 그 현실을 피부로 감각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마음 한편에 유예된 질문처럼 남아 있었다.
기억과 기록이라는 것은 결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지, 어떤 방식을 통해 현재로 불러낼 것인지 끊임없이 선택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박물관의 정돈된 유물이나 매체가 선별해 보여주는 정제된 기록 너머, 정작 이 평화를 지탱하기 위해 매일 같이 작동하고 있는 진짜 현장의 생생한 언어는 무엇일까. 거대한 역사적 서사에 가려져 생략된 최전방의 실제 온도와, 동시대 청년들의 희생을 통해 지탱되는 일상의 무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 거리감을 줄여보고 싶었다.
조부모님이 평생 향하셨을 북녘 땅의 공기를 같은 시선에서 마셔보고, 이 평화로운 일상을 지탱하는 군사적 현장의 온도를 직접 감각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대한민국재향군인회가 주최하는 휴전선 전적지 답사의 출발선에 서게 한 동기가 되었다.
2. 6박 7일, 기록 너머 현장을 걷다
06.24(수) 1일차 | 재향군인회 ➔ 국립서울현충원 ➔ 전쟁기념관 ➔ 캠프그리브스
양재역 재향군인회에 집결해 복장을 정돈하고 보급품을 확인하며 비로소 국토대장정의 막이 올랐음을 실감했다. 처음 마주한 조원들의 따뜻하고 호의적인 눈빛은 이번 여정에 대한 긴장감을 자연스레 풀어주었다.
첫 답사지인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동하여 올린 헌화와 묵념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곳은 6·25 참전용사이신 나의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평소에도 홀로 할아버지를 뵈러 찾던 곳이었기에, 대장정의 첫발을 이곳에서 내딛는다는 사실에 감회가 유독 새로웠다. '지금 내 발걸음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실까.'라는 질문은 이번 여정에 임하는 태도를 스스로 다잡게 만들었다.
단체 사진을 촬영한 뒤 이동한 전쟁기념관에서는 조원들과 6·25 참전 해외 용사들의 기록 사진전을 관람했다. 이름조차 생소했을 작은 나라의 자유와 민주이념을 위해 이국땅으로 향했던 이들의 기록, 그리고 전시장 벽면을 메운 파란 메모지들은 국경을 초월한 보훈의 의미를 묵직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어진 출정식에서 경례와 결의문 낭독을 거치며 안보의 주체로서의 첫 의식을 치렀다.
이후 임진강을 지나 파주 캠프그리브스로 향했다. 과거 미군 부대가 실제 주둔했던 시설을 안보 체험 공간으로 재구성한 이곳에서 군복을 착용하고 군번줄을 제작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진 첫날 밤, 모포를 덮고 누우며 비로소 최전방 군사 시설이라는 낯선 공간의 온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06.25(목) 2일차 | 수원컨벤션 ➔ 공군제8전투비행단
이른 아침, 6·25전쟁 제76주년 정부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원컨벤션센터로 이동했다. 이른 이동이었기에 버스 안에서 김밥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내가 거주하는 본가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익숙한 공간이 국가적 숭고함의 현장으로 자리해 있는 모습은 색다른 감회를 안겨주었다.
정부 주요 인사들과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6·25전쟁 제76주년 행사는 지켜낸 일상과 남겨진 헌신을 예우하는 자리였다. 유엔 참전국 기들과 참전부대기가 입장하고, 백발이 된 참전용사분들의 얼굴이 화면에 비칠 때 고요한 엄숙함이 장내를 채웠다. 애국가와 6·25 노래를 제창하는 순간의 장엄한 울림, 그리고 여정을 마친 후 집에서 TV로 기념식 영상을 시청할 때,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이라는 가사를 따라부르며 태극기를 흔드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이 기념식 참석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큰 자부심이자 위로였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중식 후 현충탑 참배를 드리고 이동한 공군제8전투비행단에서는 블랙이글스 및 전투기 견학을 통해 영공 수호 현장의 기지를 둘러보았다. 병영식으로 석식을 마친 후 진행된 단장님의 안보교육 중 "평화와 전쟁은 반대말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통해 현재 우리나라의 안보 상황을 다시금 직시하게 되었다. 저녁 시간에는 조원들과 야식을 나누며 '평화의 비둘기'를 주제로 소통의 밤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이날 진행된 불침번 근무 또한 특별한 사유의 시간이 되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3시, 적막 속에서 경계를 서는 일은 고요를 통제함으로써 동료가 안심하고 잠들 수 있다는 무형의 신뢰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짧은 고요 속에서 생각을 정돈한 덕분인지, 이른 아침을 더욱 상쾌한 감각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06.26(금) 3일차 | 통일전망대 ➔ 해안철책길 ➔ 을지신병교육대대
본격적인 행군이 시작된 셋째 날, 동해안 최북단 강원도 고성 DMZ 해안철책길을 걸었다. 맑게 갠 날씨 덕에 금강산 주봉 능선과 해금강이 시야에 선명하게 펼쳐졌고, 북으로 뻗어 나가는 철길은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이어진 단장님의 안보교육은 최전방이 품고 있는 안보 현실의 긴장감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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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이동한 12사단 을지신병교육대대는 과거 할아버지께서 전투 중 총상을 입으셨던 인제 지역이었기에 더욱 무거운 시선으로 현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짙은 녹음 속 자리한 부대에서 개인화기와 군 장비 견학을 통해 육군의 운용 체계를 경험해볼 수 있었다. 내무반과 병영식, 그리고 구령에 맞춰 어색하면서도 단정한 동작을 취하는 신병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온전히 누리고 있는 일상이 이들의 노고에 깊이 빚지고 있다는 부채감과 감사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저녁에는 군마트 이용 후 강동화 교수님의 안보특강을 통해 국가 안보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06.27(토) 4일차 | 딴산유원지 ➔ 파로호안보전시관 ➔ 미륵바위 ➔ 붕어섬 ➔ 아침햇살수련원
넷째 날은 딴산유원지에서 북한강변을 따라 행군을 이어갔다. 열을 맞춰 걷다가도 며칠 사이 부쩍 친해진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줄이 벌어지거나 흐트러지기도 했다. 잠깐의 휴식 시간마저도 소통의 밤 준비를 위한 사진을 촬영하며 지루함 없이 길을 걸었다.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각자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그 길은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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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바위에서 붕어섬까지 이어진 2시간 반 동안의 행군 역시 시원한 커피차와 조원들의 밝은 에너지 덕분에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수련원으로 이동한 후에는 군가 '전선을 간다'를 익히는 레크레이션이 진행됐다. 조원들과 구호를 맞추고 게임에 참여하며, 빡빡한 여정 속에서 단원들과의 단합력을 다지고 분위기를 환기하는 경쾌한 시간이었다.
06.28(일) 5일차 | 철원평화전망대 ➔ 제2땅굴 ➔ 노동당사 ➔ 열쇠신병교육대대
다섯째 날, 국군도수체조로 아침을 열고 포천과 철원 일대의 푸름을 눈에 담으며 행군했다.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풍경, 그리고 분단의 위협을 실감하게 한 제2땅굴의 서늘함과 노동당사는 그 자체로 거대한 역사적 아카이브였다. 백마고지전적비 참배 후 장병들과 함께 공작새능선전망대로 행군했던 길은 이번 국토대장정 중 가장 무더웠던 구간이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이동한 5사단 열쇠신병교육대대 진입 직전, 갑작스러운 폭우를 만났으나 동료가 선뜻 건네준 우비 덕에 무사히 이동을 마칠 수 있었다. 부대에 도착하여 젖은 신발과 복장을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고, 곧 조원들과 간식을 먹으며 소통의 밤에 발표할 영상 제작에 열을 올렸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조차 스스로를 지킬 힘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구성하고 음원을 배치하는 과정은, 안보의 의미를 우리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06.29(월) 6일차 | 평화누리 ➔ 임진강역 ➔ 애기봉전망대 ➔ 덕산스포텔
여섯째 날, 파주 임진강 인근 평화누리길을 거쳐 애기봉전망대에 올랐다. 단장님의 유쾌한 설명 속에 전투식량을 직접 체험하고, 조원들과 시원한 음료를 나누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전망대 너머 북한 지역을 바라보며, 홀로 강화도를 찾아 황해 땅을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마음과 분단선 너머를 향했던 실향의 세월을 다시금 헤아려보았다.
덕산스포텔로 이동하여 치른 마지막 밤의 '소통의 밤' 행사는 6박 7일 여정의 하이라이트였다. 조원들과 함께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약 일주일 간의 여정에 대해 담백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제작한 3분 분량의 영상 'Freedom is not free'는 비둘기라는 상징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실제적 힘은 안보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를 한마음 한뜻으로 전달하고자 했고, 감사히도 아차상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주최 측에 감사를 전하는 뜻깊은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방으로 돌아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솔한 고민부터 서로에 대한 칭찬과 감사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해가 밝아왔다. 30분 남짓 기절하듯 잠든 후 곧바로 아침 도수체조를 하러 나서야 했다.
06.30(화) 7일차 | 유엔군초전기념관 ➔ 서해수호관 ➔ 천안함 ➔ 해단식
마지막 날, 유엔군초전기념관에서 한미 장병들과 동반 참배를 올리고 견학을 진행했다. 서해회관 중식 자리에서는 현역 카투사 장병들과 함께 비빔밥을 먹으며 그들의 실제 군 생활과 현실적인 고충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대학생이신가요? 저도 대학생이었어요"라는 담담한 한마디는, 평온한 일상 이면에는 또래 청년들의 실질적인 희생이 투입되고 있었음을 다시금 일깨우는 깊은 울림이 되었다.
이어진 제2함대 천안함 견학은 대장정의 가장 무게감 있는 마침표였다. 내내 밝은 표정으로 웃음짓던 단원들도 천안함의 참혹하고도 웅장한 선체 앞에서는 엄숙해졌고, 동시에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군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그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선체를 바라보는 일은, 관념 속 안보가 지극히 구체적인 물리적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해단식에서 올린 익숙해진 경례 속에는, 일주일 간의 여정을 안전하게 이끌어준 운영 관계자분들과 재향군인회, 그리고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안보 시스템 전반에 대한 깊은 존중과 경의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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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함께 걷기
평소 혼자만의 적막 속에서 생각에 잠기는 삶에 훨씬 익숙했다. 늘 걸어왔던 비슷한 길, 비슷한 시선을 가진 이들과의 잔잔한 관계망에 머물러 있던 내게, 전국에서 모인 84명의 대원들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출신도, 전공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다른 또래들과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함께 걷고 대화하는 일은 낯설고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무더위와 폭우, 육체적 한계 속에서도 너나할것없이 서로를 향해 건네던 소소한 배려와 미소들을 통해, 안보가 지켜내야 할 실체란 거창한 이념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현실의 삶 그 자체라는 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아울러 낯선 환경에 직면한 대학생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안전하게 이끌어주신 단장님과 부단장님들, 그리고 모든 운영진 분들의 진심 어린 배려는 6박 7일의 여정을 든든하게 지탱해 준 또 하나의 중심축이었다고 생각한다.
4. 나가며
대장정을 마친 지금,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정교해졌다. 기억이란 지난 과거를 단순히 보존하는 수동적 행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불러내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능동적인 삶의 태도이자 해석의 과정으로 실천해야 한다. 분단의 아픔도, 현장의 긴장감도, 평화의 소중함도, 그리고 이를 지탱해 온 수많은 이들의 헌신도 우리가 끊임없이 소환하고 반추할 때 비로소 현재의 가치로 생명력을 얻는다.
내내 품어왔던 의문, 즉 정제된 기록과 매체 너머에 존재하는 '진짜 현장의 언어'는 무더운 여름 6박 7일간 두 발로 밟아낸 철책길과 장병들의 눈빛, 그리고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관념에 머물던 안보와 평화의 무게를 현장에서 직접 감각해낸 경험,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헌신과 동료들의 미소는 앞으로의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단단한 힘이 될 것이다. 이처럼 뜻깊은 경험과 배움의 장을 마련해 준 재향군인회와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했던 3조 친구들, 그리고 제16기 국토대장정 대원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konas)
홍익대학교 4학년 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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