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대학생 국토대장정] 소감문(4) 내가 서 있는 자리
(이 글은 '제16회 향군 대학생 국토대장정' 소감문 우수작으로 선정된 글 입니다.)
나는 ‘최정은’이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을 하다보니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 현재 내가 딛고 있는 자리를 알 필요가 있었고, 그 위치를 알기 위해선 주어진 환경 또한 이해를 해야 했다. 때마침 대학생 국토대장정 모집 소식을 듣고 국토대장정이라면 내가 무엇을 딛고, 어디에 서 있는지 아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출발점으로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라는 질문과 ‘내가 서 있는 이 곳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물음을 품고 7일의 여정을 시작했다. 국토대장정을 통해 나는 내가 있는 지금의 땅이 어떻게 지금의 땅이 되었으며, 누구와 함께 이 땅을 밟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인 연
국토대장정 6박 7일 동안 바라본 전적지들은 치열한 긴장과 싸움이 있었던, 우연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필연의 장소들이었다. 반면, 그 길을 함께 걷는 98명의 동료는 우연히 모인 인연들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국토대장정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7일 내내 동고동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기하면서도 진중한 마음을 갖게 했다.
우리는 여러 군부대와 전적지를 탐방하며 북한 땅을 눈앞에 두고 돈독해졌다. 함께 동심협력하며 지낸 시간 동안 우정과 동료애는 깊어만 갔다. 끈끈해진 동료들과 여전히 긴장감이 맴도는 역사적 장소에 함께 서 있는 역설적인 상황은, 역사의 무게감과 숭고한 희생을 더욱 깊게 느끼게 했다. 당장에는 우연 같아 보였던 우리들의 만남이, 알고 보면 이 땅을 지켜낸 과거의 필연들이 만들어낸 소중한 운명처럼 귀하게 다가왔다.
■ 여정: 묵념의 마음으로
파주 캠프 그리브스에서 느껴지던 민간인 통제선 특유의 서늘한 공기는 분단의 현실이 결코 먼 이야기나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6·25 기념식에서 뵈었던 참전유공자 어르신들의 굽어진 등과 가슴의 훈장을 보며, 내가 누리는 보통의 하루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았다. 인제 12사단 신교대대에서 묵을 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내 또래 청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경계 위에 서 있기에 내가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내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통의 뙤약볕 길을 걸으며 발바닥이 부어오르고 땀이 눈을 가릴 때도 있었지만, 진짜 마음을 흔든 것은 밤에 서 보았던 내 생애 첫 불침번이었다. 모두가 잠든 정적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는 동안 묵직한 생각이 스쳤다. 누군가 잠든 사이에 그 잠을 지키기 위해 깨어있는 마음. 과거 이 땅을 지켰던 수많은 이들도 매일 밤 이런 어둠 속에서 가족과 이 땅을 생각하며 경계를 서지 않았을까. 침묵이 때로는 더 묵직한 의미를 전달한다고 말한다. 그 밤의 정적 속에서 나는 그 침묵의 무게를 배웠다.
파로호와 화천 붕어섬의 아름다운 풍경 밑바닥에는 6·25 전쟁 당시 흘린 수많은 피가 고여 있었다. 철원 백마고지와 5사단 평화의 길, 연천으로 이어지는 치열했던 고지전의 현장, 파주 반구정길과 김포 애기봉에서 바라본 손닿을 듯 가까운 북한 땅, 그리고 한미 장병들과 함께 방문한 오산 죽미령 전투 현장까지.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풍경과 전적지의 위령탑 앞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이 땅의 평화는 단 한 번도 거저 주어진 적이 없음을 조용히 확인했다.
■ 동료애
이 여정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건 곁에 있던 동료들 덕분이었다. 특히 나와 매 순간을 함께한 조원들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말없이도 깊은 든든함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가파른 언덕길이 나오면 뒤에서 배낭을 밀어주고, 휴식 시간엔 말없이 서로의 안전을 챙겨주었다. 매번 고맙다고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고마움이 전해졌다. 덕분에 힘들고 지치는 길도 웃으며 걸을 수 있었고, 그 온기 덕분에 과거의 희생이 한층 더 가슴 깊이 다가왔다. 이런 동료들이 있기에 나 역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하나의 팀이 된다는 건 곧 서로를 챙기는 작은 공동체가 된다는 뜻이었다. 거창한 말 대신 서로를 향한 작은 배려 속에서 사랑과 존중, 그리고 연대의 힘을 다시 믿게 되었다.
■ 과거와 현재의 도치
전적지를 돌아보는 동안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강연문에서 던졌던 문장이 마음을 흔들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국토대장정 길 위에서 나는 그 질문에 마음으로 답을 내렸다. 그렇다. 과거는 분명 현재를 돕고 있었고, 이름 없이 쓰러져간 이들의 희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구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내가 평화로운 신분으로 만나 함께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시간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과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평화를 믿을 수 있게 해주는 바탕에는 과거 수많은 이들이 바친 피와 땀이 있었다. 백마고지와 죽미령에서 희생된 푸른 청춘들의 필연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소중한 우연은 없었을 것이다.
■ FREEDOM IS NOT FREE
전적지에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단장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을 떠올렸다. 단장님께서는 "전쟁과 평화는 반의어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세상은 참 단편적이지가 않다. 너무 입체적이다. 전쟁과 평화는 완전히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발을 맞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더 깊고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나는 그 통찰이 결국 이 땅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세상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여정을 마치며 던져주신 "치열하게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치열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마주한 순간과 인연들에 아낌없이 열정을 다하는 일이며,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정직한 행복이었다. 이번 대장정은 내게 그 행복을 아낌없이 누릴 용기를 주었다.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동료들은 물론이고, 눈앞의 평화를 가능케 한 과거의 숭고한 희생들까지 모두 내 삶 속에서 치열하게 기억하고 사랑해야 할 귀한 유산으로 가슴에 깊이 남았다.
■ 발걸음
"고민되면 뛰어가고, 힘들면 걸어가라"는 단장님의 끝인사는 우리가 걸었던 이 수많은 발걸음의 의미를 가장 잘 담아낸 말이었다. 생각에만 파묻혀 주저앉는 대신 일단 나아가고,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 소박하고도 강력한 다짐이야말로 이 여정이 내게 남겨준 진정한 가치였다. 이 길 위에서 흘린 땀방울과 새겨넣은 오랜 걸음들은 앞으로 내 삶에 끊임없이 찾아올 수많은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 줄 단단한 용기의 밑바탕이자,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뿌리가 되어줄 것이다.
오래 걷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나 역시 빠르게 지나쳐가는 풍경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 두 발로 직접 먼 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다. 빠르게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길 위의 깊은 상흔들과,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이 땅의 무게감이었다. 땀 흘려 걷는 정직한 노동 뒤에 찾아오는 동료들과의 온기와 평화의 소중함은 자동차나 대중교통의 빠른 속도감 속에서는 결코 느껴볼 수 없는 진짜 삶의 감각이었다.
■ 도착한 출발점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이 여정의 끝에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과 희생으로 지켜진 곳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누리는 오늘과 평화는 나 혼자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희생에 깊이 빚을 지며 살아가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제 나는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최정은으로서 이 감사의 마음을 결코 잊지 않으려 한다. 과거가 현재를 구했듯, 이제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그들의 희생과 용기에 답해야 할 차례다. 내 두 발로 정직하게 새긴 이 대장정의 걸음과 용기를 가슴에 품고, 내게 남겨진 삶을 치열하게 사랑하며 과거의 사랑이 지켜낸 오늘을 감사히 걸어나갈 것이다. (konas)
을지대학교 최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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