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기념] (53) 한강 방어선 전투 전사자명비
오늘날 노들나루공원에 가 보면, 태극과 건곤감리 모양의 구조물이 있다. 그 뒤에는 1,000명의 이름이 세겨진 비석이 우뚝 서 있다. 한강을 바로 코앞에 둔 이 공원에, 이런 구조물이 왜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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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가기에 앞서, 많은 자료에서 6.25 전쟁 초기를 다룰 때,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적절하지 않은 설명이다. 북한군이 3일만에 서울에 입성한 것은 맞지만, 국군은 그 뒤로도 약 일주일 동안 서울을 방어하는데 성공했으니까. 해당 전사자명비는 이름은 바로 해당 전투인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한강 방어선 전투가 시작되었을 당시만 해도 국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대다수의 부대는 붕괴된 채 전열도 수습하지 못하고 후퇴하고 있었고, 서울 북부에서는 적의 기갑부대가 목격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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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개전 이틀 후 미국과 유엔이 개입을 결정했으나, 아직 지원군이 도착하기까지는 한참이 더 걸릴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 서울이 빠르게 붕괴된다면 대한민국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북한에 의해 점령당했을 것이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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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국군의 김홍일 장군은 한강 방어선을 전담하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는 서울 시내에 남은 부대를 혼성수도사단, 혼성 2사단, 혼성 7사단 등으로 재편한 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해 한강을 끼고 방어전을 벌였다.
반면 오직 빠른 진격이 살길이었던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공세를 퍼부었다. 6월 29일 도하에 앞서 여의도 방면에서 탐색전을 실시하고 밤섬을 장악한 북한은, 6월 30일부터 신사리에서 말죽거리, 김포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대규모 도하를 실시했으나 저지되었다.
다음날인 7월 1일, 이번에는 영등포와 여의도 방향으로 북한이 도하를 실시했으나, 국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실패했다. 북한은 2일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지만 국군 또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6월 30일 맥아더 장군이 직접 전선 시찰을 나온 뒤로 국군의 사기는 되려 고무되었다.
그러나 7월 3일, 폭약이 모자라서 완전히 폭파하지 못한 한강 철교를 통해 북한이 도하에 성공했고, 이로서 6일간에 걸친 방어전은 막을 내렸다.
결국 국군은 북한으로부터 서울을 사수한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무려 6일 동안이나 서울에서 북한의 선두부대를 지연시키는데 성공했다.여기에 동부전선에서는 제6사단이 춘천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는데 성공했던 덕분에, 대한민국의 양 끝단에서 북한군의 진격이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
이렇게 국군이 귀중한 시간을 버는 동안, 미군의 스미스 임무부대 등 지상군과, 일본에 주둔한 공군 전력이 빠르게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북한군은 전쟁을 빠르게 끝낸다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늘날 한강 이남에 1,000명의 이름이 세겨진 전사자 추모비가 자리잡고 있는 이유이다. 이들은 전부 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국군 측 장병들인데, 전술했듯이 당시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웠던 탓에 소속은 전부 달랐다.
육군만 하더라도 수 개의 다른 사단에서 모인 장병들이 뒤섞여 있었고, 여기에 공군 및 경찰에서 동원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소속은 달랐을지언정, 이들은 모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오직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들의 분투는 그때까지만 해도 뻔했던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사자명비에 적힌 1,000명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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