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 대승' 주역 이범석 장군 41주기 추모제
조국!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 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제 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인 것이다.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 ‘우등불’ 중에서)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고 광복 후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 제 41주기 추모제가 10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회장 황경섭) 주관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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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추모제는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원, 광복회원, 유족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범석 장군 약력보고, 추모식사, 추모사에 이어 헌화·분향, 조총발사 순으로 진행됐다.
황경섭 회장은 추모식사에서 이범석 장군에 대해 “16세의 어린나이에 조국광복의 큰 뜻을 세우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군인·혁명가의 험난한 길을 선택하고 ‘청산리항일대첩’을 진두지휘하여 위축되어가던 한민족의 독립혼을 되살림은 물론 조국광복 후 건국의 초석이 될 동량 육성과 대한민국정부 수립시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건국과 창군의 주역으로 나라의 부흥과 건설에 앞장서 왔다”며 회고하고 장군의 넋을 위무했다.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축사를 통해 “청산리 전투는 절대적 약세를 극복한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며 “장군의 삶은 위국헌신 자체”라고 평가했다.
이범석 장군(1900.10.20~1972.5.11)은 1915년 여운형의 권유로 중국으로 망명해 운남강무학교에 입학,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장교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대첩에서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장군을 도와 제2제대(第二梯隊) 지휘관으로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본 토벌군 주력부대를 강타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대전과를 올렸다.
이후 김좌진과 함께 북로군정서군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10여 차례 격전을 치러 큰 승리를 거뒀다.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으로서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해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할 계획을 세우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서 국가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에 공헌했다.
저서로는 회고록인 ‘방랑의 정열’, 논설집 ‘민족과 청년’ ‘우등불’ 등이 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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