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사회복무요원 체험 수기⑪] 커피 한 잔, 그 기분 좋은 여정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7 사회복무요원 체험 수기」 공모에서 당선된 글임.(편집자 주)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셔봤을 ‘카라멜 마끼아또’. 그것이 누군가에게 내어지기 위해선 몇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먼저 원두를 갈아 담고(Dosing), 담긴 원두를 다듬고 눌러준 뒤(Tamping), 원액을 추출합니다(Extraction). 우유를 붓고 지그재그로 시럽까지 얹어주면(Drizzling) 완성입니다.
저는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면서 한 잔의 달콤 쌉싸름한 커피를 만들고 있습니다. 저만의 맛있는 커피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원두를 곱게 갈아 담아봅니다.
*Dosing-‘경험을 담다’
처음 주민센터로 출근하던 날, 여러 생각이 제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주민센터는 편하겠지?’라는 생각부터 같이 근무할 분들은 어떨지, 2년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등등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가장 지배적이었던 생각은 주민센터는 할 일도 없고 재미있는 일도 없을 테니 시간을 어떻게든 잘 떼워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한 주, 한 달 근무할수록 제가 그렸던 것과는 약간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국방의 의무 2년은 내 소중한 청춘을 낭비하는 시간일 뿐이라 여겼던 제 생각은 이곳에서 차곡차곡 쌓이는 경험들을 통해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주민센터에서의 경험은 마치 곱게 갈려 쌓이는 커피가루 같습니다.
공대생으로 책상 앞에서 복잡한 수식만 열심히 공부하다 온 저는, 크게 몸 쓰는 일을 해본 적도 없고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반에는 주민센터에서 주시는 업무들이 약간은 생소하면서 어려웠습니다. 창고를 정리하고, 무거운 대형 쓰레기를 나르는 등 힘쓰는 일부터 직접 민원을 보러 오신 주민들을 상대로 각종 신청서를 받거나 친절하게 안내를 해야 하는 감정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많은 경험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몇 가지 있는데, 한 번은 아침부터 술을 잔뜩 드시고 온 할아버지가 오신 적이 있습니다. 신청 안내를 해드리려 했지만 대화가 서로 통하지 않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셔서 결국 휠체어로 댁까지 모셔다 드려야만 했습니다. “학생, 이것 좀 사와. 저것도 사오고 그리고 말이야..”가는 길에 시키시는 잔심부름과 마주한 높은 오르막길은 주민센터도 결코 편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주민 분들도 많이 마주했지만 그 못지않게, 어떤 날은 더 많이 함께 근무하는 분들과도 마주하며 이전에는 해보지 못한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사님들과는 간단한 서류 정리부터, 직접 주민들을 만나며 발로 뛰는 외근으로 함께 하기도 합니다. 공무원은 편한 직업이고, 무료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저는,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주민들의 편의를 돕는 모습을 보며 주민센터에서 근무하는 것도 꽤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곳저곳 현장을 이동하는 길에 주사님들께 진로에 대한 조언을 종종 들을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 외근 가는 길은 저에게 굉장히 유익한 시간입니다. 저에게 슬쩍 공무원을 권하시기도 하고,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의미 있게 사용하라는 진중한 조언을 건네주시는 분들도 계셔서 장래에 대한 제 사고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저와 많은 시간을 보낸 분들은 장애인 행정도우미 형, 누나입니다. 영민이 형은 제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상담실의 행복바이러스입니다.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항상 밝게 웃는 형은, 크고 작은 실수들로 때로는 저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합니다. 형이 저질러 놓은 실수들을 뒤처리하며 “내가 형을 위한 사회복무요원이야!”라며 농담을 하기도 하지만, 형은 장애를 가진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의 하찮은 편견을 바꿔준 소중한 형입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며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생각들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저의 경험들은 어느새 차곡차곡 쌓이고 압축되어 약간은 달라진 생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Tamping-‘생각을 다지다’
보고 느낀 것을 압축했더니 작은 관점의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도우미 형, 누나와 함께하면서 장애가 있으면 불행하다는 잘못된 관점이 깨졌습니다. 장래에 대한 사고방식이 단순히 제 전공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그 틀에서 벗어나 장래에 대해 폭 넓게 생각할 수 있게 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변화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사회복무요원으로 제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회복무요원이 얼마나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겠냐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꿀 공익이다’, ‘2년 내내 휴가다’하는 얘기를 꽤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는 과정 중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보람을 맛보면서 그 생각이 깨졌습니다.
신청서를 안내해드리고 끝까지 다 썼을 때 “친절하게 얘기해줘서 고마워요.”하시는 한 마디, 쌀을 배달해드렸을 때 “무거울 텐데 고생했어요. 고마워요.”하시는 격려의 말씀이 제게는 작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내가 생각했을 때는 별 것 아닌 수고였는데, 고마워하고 도움이 되었다고 해주시다니..내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구나!’덩달아 평소 낮았던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평소에 고민거리였던 낮은 자존감을 높여주시니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쌓인 경험들이 저의 생각으로 다져졌습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지내는 시간은 주민에게 봉사하고 드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배우고 받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리고 바뀐 저의 생각들이 일상의 변화된 모습으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Extraction-‘생각의 변화가 행동으로 추출되다’
스쳐 지나갔던 많은 분들의 작은 격려들은 모여서 저의 낮은 자존감을 높여 주었습니다. 높아진 자존감은 저의 행동에 자신감을 더해줬습니다. 복무를 시작하기 전에는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작은 행동 하나, 말 하나를 할 때에도 자신감 있게 하지 못했는데, 물론 갑자기 자신감이 철철 넘치진 않지만 저는 조금씩 제 생각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
또 격려와 조언들은 저를 복무생활에 보람을 느끼도록 해주었는데, 이것은 사회복무요원으로서 복무하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도록 해주었습니다. 처음 저는 병역판정검사 4급을 판정 받고 다른 친구들은 집을 떠나 멀리서 군 복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 혼자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생활에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회복무요원으로 느낄 수 있는 보람을 경험하면서 바뀌었습니다. 친구들은 직접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면서 봉사하는 것이고, 저는 직접 국민들과 마주하면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긍심을 한가득 가지고 복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차적인 얘기지만, 저는 종종 일기를 쓰는데 생각이 바뀌고 나서부터는 일기 쓰는 것도 즐거워졌습니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지겨운 삶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마주하며 나눴던 대화와 보람 있었던 일들을 적다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 사람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애인을 무조건 도와줘야만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도울 때는 돕지만 일할 때는 함께 일할 수 있는 동등한 친구로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래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저의 진로에 대한 진지한 탐색도 시작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창업이나 여러 직업들을 찾아보며 미래도 준비하는 중입니다.
*Drizzling-‘그럼 어떤 마무리를 할까?’
드리즐은 완성된 커피 위에 시럽을 올려주는 마무리 단계입니다. 결실을 맺는 단계인데, 드리즐로 맛있는 카라멜 마끼아또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커피가 담겨져 있는 것이 필수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좋은 커피를 내리고 있지만 남은 복무 기간 중에, 그리고 복무를 마치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서 커피를 조금 더 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는 그 뒤에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회복무요원 시절에 갖게 된 성숙한 사고들이 저의 삶에 든든한 밑받침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듭니다. 절반 정도 복무를 진행했는데, 남은 기간 동안에는 어떤 또 다른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을지, 그것이 저에게 어떤 전환을 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원두를 갈아봅니다.
전현석(김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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