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사회복무요원 체험 수기㉒] 좌절에서 희망으로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7 사회복무요원 체험 수기」 공모에서 당선된 글임.(편집자 주)
의사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저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11살 때 미국으로 떠나 초, 중,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거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의 꿈은 치과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마침내 제 어렸을 때 꿈이던 로마린다 치과대학에 입학했고 제 꿈을 이룬듯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대학병원에서 학생의사로 근무를 했습니다.
미숙했지만 수많은 환자를 보면서 의사로서의 실력이 향상됐고 여러 환자분들과 교수님의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졸업을 하고 나면 멋진 병원에 취직해 치과의사로서의 의무와 소신을 다 하며 살겠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습니다. 마치 저의 인생이 막힘없이 쭉쭉 나아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의사면허증이 나올 때 쯤, 제가 군문제로 인해 더 이상 치과의사로서 미국에 있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군 복무로 인해 제가 쌓아온 커리어에 오점이 남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치과의사가 부족한 미국에서 불법적으로 군대를 회피하는 방법도 있었기 때문에 저는 많은 유혹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는 너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국민으로서 마땅히 모든 의무를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군회피를 고민하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營년 9월 저는 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저의 나라 대한민국에 돌아왔습니다.
병역판정검사에서 오랜 공부로 인해 생긴 디스크 탈출중 때문에 4급 판정을 받고 사회복무요원이 되었습니다. 저의 발령지는 전주 지방법원이었고 그곳에서 현재까지 15개월째 복무중입니다. 한국에 돌아와 복무하던 초기 시절, 저는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정 당당히 의무를 다하고 있었고, 그것이 자랑스러웠지만 미국에서 커리어를 쌓고 있는 동기들의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커리어는 정체되어 있는데 그들은 제가 가고 싶었던 병원에서 경력을 쌓고 돈을 벌고 있다는 소식에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저는 전주 지방법원에서 복무하며 절망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찾았고, 사회복무요원이 된 것에 대해 후회가 아닌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제가 절망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찾은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전주법원 그곳은...
저는 처음부터 훈련소로 가지 않고 근무지에서 근무하는 도중에 훈련소를 가는 선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대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전주 지방법원에 도착한 첫날, 선임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전주지방법원의 사회복무요원의 숫자는 30명 정도였고 그 숫자가 저를 압도했습니다.
또한 모든 사회복무요원들이 저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에 두번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미국 치대는 8년제다 보니 복무 시작했을 때 제 나이는 28살이었고, 모든 사회복무요원들은 2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2년간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겪고도 제가 가장 놀란 사실은 사회복무요원들의 업무가 너무너무 다양하다는 것 이었습니다.
전주 지방법원의 사회복무요원은 정말로 법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대부분 주차 통제 업무부터 법원 보안관리, 그리고 각종 사무업무까지, 그들의 업무는 제가 들은 것 보다 많았습니다. 처음 사회복무요원이 전주지방법원에 발령 날 때, 주차 업무부터 배웁니다. 저는 주차업무를 약 40일간 했었고 그곳에서 하루에 7시간씩 서서 추위와 더위를 이기면서 주차 관리를 했습니다.
몸도 많이 힘들었지만 제일 힘들었던 것은 민원인들의 원망과 원성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주차공간이 항상 부족한 전주지방법원은 민원인들의 주차문제로 고통받고 있었고 그 원망은 그대로 주차관리를 하고 있는 사회복무요원에게로 향했습니다. 제가 있던 대학병원에서 저는 닥터라는 소리를 들으며 뉴비닥터로서 스태프들과 환자들에게 선망과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원망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었던 저는 상처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법원에서의 생활에 너무 많이 지쳤을 때 쯤, 주차업무가 끝났고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났습니다. 제가 새로 근무하게 된 부서는 가족관계등록계였습니다. 그곳의 주 업무는 합의이혼과 개명신청이었습니다. 저의 업무는 민원인 상대 및 직원들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은 크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빴습니다. 그곳은 여러 격한 감정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합의 이혼이지만 납득이 안가는 분들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슬픈 감정을 갖게되는 자녀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아직 많이 남은 복무기간을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훈련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35사단 훈련소
훈련소에 갔을 때 저는 많은 것을 느꼈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은 여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머리를 비우고 생각하기 매우 좋은 곳 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인 평화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훈련소에서는 여러 환경에서 자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잘나가는 동기들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복무요원들 모두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나라를 위해 불편한 몸을 무릎쓰고 온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2년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이기심이 부끄러웠습니다. 그곳에서 훈련받으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잘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훈련소를 마치고 나왔습니다.
내가 정말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
훈련소에서 무사히 나오고 나는 곧 전주법원에 복귀했습니다. 불만이 많던 저는 새로운 느낌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더 이상 좌절하지 않았고 좀 더 행복한 마음으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께서 법원에서 나가는데 너무 힘들어 보였습니다. 전주법원은 높은 경사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가 아직 설치되어있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께는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과 같은 곳으로 불리웁니다.
누구도 그분께 관심을 보이지 않아 제가 나서서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휠체어에 그분을 옮기고 높은 경사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체구가 커서 별로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 손을 잡고 감사하다면서 하느님에게 축복받을 청년이라면서 눈물을 글썽이고는 택시를 타고 가셨습니다.
솔직히 큰일은 아니었고 그렇게 대단한 칭찬도 아니었지만 삭막한 제 마음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의사가 되고 싶었는지도 다시 생각났습니다. 제가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어렸을 때 의료봉사 활동에서 제가 도와준 사람들의 행복하고 고마워했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진심 어린 감사가 그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바뀐 나, 그리고 새로운 희망
그 뒤로 저는 매달 한번 씩 주말에 치과 치료를 못 받는 외국인 분들을 위해 무료 진료소에서 치과 봉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주중에는 민원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정말 보람되었습니다. 저에게 욕을 하는 민원인들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각자가 얼마나 힘들고 지쳤으면 저에게 욕을 할까 생각하면서 더 잘해드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사회복무요원이 된 것이 행복합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임플란트 기술이 발전된 치과 선진국입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동안 임플란트 기술을 연마해서 저만의 치과 봉사 제단을 차려 봉사하는 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주말마다 시간이 나면 새로운 임플란트 기술을 배우러 여러 세미나에 참석하곤 합니다.
감사하게도 군생활 중 봉사활동과 세미나 활동을 열심히 한다면서 제대 후 저를 좋은 조건에 고용해주기로 한 원장님도 만났습니다. 저에게 꿈을 주고 봉사의 참의미를 다시 일깨워준 사회복무요원으로서의 시간들이 감사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저는 뒤쳐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사회복무요원 기간 동안 배우고 느낀 것을 발판삼아 꿈을 이루는 멋진 의사, 멋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옥규 / 전주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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