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기념 시설물 소개」 (82) 임진강지구 전적비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 전쟁을 보면 포탄이 쓸고 간 지역은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당연하듯 보게 된다. 우리가 겪은 6.25전쟁도 마찬가지로 어느 전투, 어느 지역 참혹하지 않은 곳이 없었겠지만 유달리 파주 임진강 유역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지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의 하나로, 국군 제1사단과, 해병 제1전투단 및 유엔군은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1979년 12월 30일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임진강 지구에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N자형의 비는 유엔의 N자를 딴 것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임진강에서 격전을 치룬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강을 두고 전투하였다는 뜻이 있으며, 횃불을 든 것은 통일을 염원하는 표시이다.
많은 장병들이 산화한 곳이기에 전투 당시에 돌아가신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고 전공을 후대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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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지구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05시 45분 북괴 3개 사단(1,6,7사단)의 병력 및 장비로 문산-적성 방면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하자, 연백-개성-고랑포-적성 일대에 38도선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국군 제 1사단이, 개성-파주-문산-봉일천 일대에서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을 상대로 4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다.
국군 제 1시단은 대전차포 중대와 대전차 특공조를 운용해 저지하는 한편, 임진강의 천연장애물을 이용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6월 28일에 서울이 함락됨으로써 퇴로가 차단되어 부득이하게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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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4 후퇴 이후 재 반격에 나선 국군은 1951년 3월 중순 이후 서울을 탈환한데 이어 북진을 계속한 이후, 3월 31일 파주 임진강 일월봉(191고지) 부근에서 기습으로 임진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격파함으로써 개전 초기의 패배를 설욕하게 된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임진강 유역을 상실했지만, 6월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6월 반격작전으로 다시 임진강 유역을 회복해 임진강 유역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 지역 전투에서 특별한 전공자로 김만술 소위가 있다. 김만술 소위는 제1사단 제11연대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1953년 7월 15일 중서부전선 전초진지인 베티고지에서 불과 1개소대 병력으로 13시간동안 인해전술로써 파상 공격해오는 중공군 2개대대를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격퇴시켜, 사살 356명이라는 혁혁한 전과를 세워, 금성태극무공훈장과 한국인으로서 최초 미국십자훈장을 수여 받은 전쟁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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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는 임진강 지구 전투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부의 요충지 임진강은 남북을 잇는 관문이요, 혈맥이다. 여기에 공산군의 화살을 꽂아 4년. 제1사단, 해병 제1전투단 및 유엔군은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해 몸을 던져 사선을 지켰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은 영원히 혈맹의 교훈을 받은채 통일의 그날을 지켜볼 것이다.’
평일에도 많은 내·외국인 관람객들이 찾는 임진각이다. 각종 참전 시설물로 전쟁의 참상을 간접 경험하는 안보현장이기도 하다. 전적비 앞에서 잊혀져가는 6.25전쟁을 다시금 생각해 보고,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잠시 고개를 숙여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한 마음을 전해본다 .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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