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에블로호 납북사건과 북한의 도발
미 국방성이 밝힌 프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수한 정보수집함으로 906톤, 길이 약 45미터, 폭 10미터, 12.2노트 규모의 소형함정이다.
프에블로호가 납치되기 2일 전인 1월21일에는 북한 특수부대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나 한반도는 그야말로 전쟁 일촉즉발의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월24일 판문점에서는 제261차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렸다. 유엔군의 요청으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 유엔측 대표 스미스 소장은 북한 무장유격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은 남침도발의 새로운 형태라고 비난하면서 프에블로호가 육지로부터 16마일 떨어진 공해상에서 납북되었다고 지적, "미국은 국제법상 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즉각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측 박중국 대표는 1·21사태에 대한 답변은 회피한 채 프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 자기네 영해를 침범해 왔다며 납치 장소도 공해상이 아니라 자기네 영해권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프에블로호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사건 당일 즉시 일본에서 월남(越南)으로 향하던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 편대를 동해로 회항을 명령하고 원산만에 대기토록 했다. 24일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북한이 취한 행동은 일종의 전쟁행위로 규정지를 수 있다"고 발언해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같은날 존슨 미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수습방안을 토의했다. 우선 외교적 교섭을 통한 해결책으로 소련의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었고 뒤이어 판문점 휴전회담에서도 협상이 실패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TV방송을 통해 프에블로호 납치를 공해상에서 자행된 침략행위라고 규정하고 공군과 해군 예비역 1만4천6백명에 동워령을 내리는 한편, 전투기 및 수송기 372대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으며, 오산과 군산 공군기지로 2개 비행대대를 급파했다. 또한 28일에는 2척의 항공모함 요크타운호와 레인저호, 그리고 구축함 1척, 잠수함 6척의 새로운 기동함대를 한일(韓日) 해역으로 이동시켰다. 전운(戰雲)이 감도는 긴장감이 한반도 주변을 에워 쌓았다.
유엔측 대표와 북측 대표는 그후 20여 차례에 걸친 비밀회담 끝에 12월23일, 납북된지 325일만에 승무원 83명 전원(시신 1구 포함)이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다. 그러나 승무원이 송화되기까지 비밀회담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국이 적당한 사과의 뜻을 표명하고 상당한 양보가 있었던 것으로 후일 전해졌다.
한편 프에블로호 납북사건을 전후한 1967년~669년 사이는 북한의 도발이 어느해 보다 자주 일어났다.
프에블로 납북 1년 전인 1967년 1월19일 오후 1시50분에는 동해 거진 앞바다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우리 해군 소속 PCE 56함(당진함=650 톤, 함장=金承培 중령, 승무원79명)이 북한 해안포의 집중사격을 받아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해군 장병 39명이 전사했다.
1968년 1월21일에는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124군 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 침투하는 소위 1·21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군, 경찰, 민간인 등 28명이 사망하고 침투한 북한군 31명 중 29명은 사살했고 1명 생포했으나 1명 북으로 도주했다.
또 같은해 10월30일, 11월1일, 11월2일 세차례에 걸쳐 124군부대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해 왔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민간인을 감금하고 북한을 찬양, 선전하면서 반항하는 민간인을 총과 칼로 무차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모두 군과 경찰의 합동작전에 대부분 사살되었으나, 우리측 군·민 사상자도 70명이나 있었다.
1969년 4월15일 오후 2시 경에는 동해 상공을 정찰비행 중이던 미해군 EC121 정찰기 한대가 북한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어 31명의 승무원 모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 1969년 12월11일 12시25분 강릉발 서울행 대한항공 소속 YS-11기가 승객 47명(승무원4명)을 태우고 대관령 상공을 비행하던 중 재남(在南) 고정간첩 조창희(당시 42세)에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은 이 여객기가 항로를 변경하여 잠적한 다음날에야 착륙지점을 밝히지도 않은 채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입북'이라는 간단한 보도만 했다. 납북자들은 1970년 2월14일 탑승자 51명 가운데 39명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이들은 납북된지 65일 만에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나머지 12명은 아직도 북한에 억류돼 있다.
|
납북 38주년···北 "美 자주권 침해에 초강경 대응"
북한은 美해군 정보수집함 프에블로호 납북 38주년이 되는 23일 관영매체들을 통해 "미국의 자주권 침해에 추호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며 주민들에게 대미항전(對美抗戰) 의지를 고취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하는 공화국(북한)의 초강경 앞에 미국 정부는 간첩선(푸에블로호)의 정탐과 적대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어떠한 함선도 조선 영해를 침범하지 않도록 할 것을 담보한다는 문건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통신은 그러나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의 교훈'을 망각했다면서 "공화국은 미제(美帝)가 '핵문제'를 구실로 주권 국가의 최고 이익을 침해한 2003년 1월, 자주권과 생존권,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는 초강경 조치로 반공화국 책동을 짓 부숴버렸다"고 말했다.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도 이날 "미국은 38년 전 푸에블로호의 운명에서 교훈을 찾는 대신 지금도 계속 핵전쟁의 불구름을 몰아오기 위해 날뛰고 있다"면서 "미국은 우리 공화국을 범죄국가니 위험스러운 정권이니 하고 모독하는가 하면 모든 제재 수단을 다 갖고 있다며 경제적으로 압박,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이트는 또 "미국이 우리 공화국을 그 무슨 제재로 압살해 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며 "미국은 푸에블로호의 교훈을 잊지 말 것"을 촉구했다.
또 조선중앙TV는 이날 푸에블로호 나포 막전 막후를 담은 기록영화를 특집으로 방영했다. TV는 현재 평양 대동강변에 전시돼 있는 푸에블로호를 언급하며 "역사의 전시장에서 우리 인민군대와 인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 본성을 더욱 똑똑히 깨달으며 변함없는 계급적 자각과 필승의 의지를 간직한다"고 방송했다.
북한은 1968년 1월23일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으로 끌어간 뒤 '반미교양박물관'을 조성해 '대미(對美) 승리'의 상징물로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매년 이날을 전후해 주민들에게 프에블로호를 견학시키며 반미 대결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北, 베트남전때 미군에 참패하자 푸에블로 납치"<美전문가>
한편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것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북한 조종사들이 미군과의 공중전에서 참패, 체면이 크게 손상됨에 따라 이를 보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자 대북 전략 전문가인 제임스 줌왈트가 23일 주장했다.
미해병중령 출신인 줌왈트는 이날 워싱턴 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북한의 푸에블로호가 이날로 나포된지 38주년을 맞지만 그 동기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면서 베트남전 당시 미-북한군간 공중전 관련 정보와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이같이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북한이 북한 해안 부근 공해상에서 작전중이던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려 미그기 2대를 출동시킨 가운데 4척의 순찰정으로 포위, 먼저 사격을 가했으며 50 밀리 기관포 1정만을 갖고 있던 푸에블로호는 반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다른 북한 선박이 추가로 접근하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는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면서 진정한 푸에블로호 나포 동기는 이 사건이 발생하기 바로 전해 북한이 비밀리에 베트남전에 공군 조종사들을 참전시켰다가 참패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그 근거로 푸에블로호의 임무는 최소한의 위험을 수반한 것이었으며, 항해 당시 군사적 공격이 임박한 것 같은 징후는 전혀 없었다는 것.
황씨에 따르면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북한이 다른 동맹국들과의 협의 없이 단독으로 계획됐으며, 지도자 김일성과 군부는 손쉬운 먹잇감을 조심스럽게 찾고 있었다는 것.
줌왈트는 북베트남군 조종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1967년초 북한 조종사들을 베트남전에 참전시켜 미군과 싸우게 해달라며 북베트남측에 압력을 넣었으며 북베트남은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전투기들을 몰고 나가 미국 조종사들과 접전한 북한 조종사들은 모두 격추당했으며, 이로 인해 북베트남측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고 북한 조종사들은 두달만에 귀국하게 됐다.
북베트남 조종사들은 북한 조종사들이 한국전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미군과 싸우기를 고집함으로써 달라진 전투 기술과 기법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 (konas)
김 철 기자 konasnet@konas.net













![[안보칼럼] 강한 국군이 곧 평화의 조건이다](/img_data/article/260930/260930_63035.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