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누가 6.25를 統一戰爭이라 하는가'
한길사가 펴낸 책 가운데 대표적인 좌경도서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6권 56 쪽에는 이런 말이 있다, "6월 25일 북한정규군의 남하가 전면적 남침이 아닌 제한적 무력동원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의 몸부림임을 알 수 있다. 즉 제한된 무력동원을 통해 서울을 점령,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후 통일지향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한국회를 소집하여 통일정부를 수립⋅선포하기 위한 제한적 무력사용을 통한 통일전선전술이었던 것" 이라고.
보건데 남침적란(南侵赤亂)을 남하(南下)로, 북괴군이 전 전선에서 일제히 전면전을 개시한 것을 제한적 무력사용으로, 서울에서 군사전략상황판단에 따라 지체한 것을 '국회소집하여 통일정부수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종북주의자로 잘 알려진 강모의 내전론(內戰論)은, 전후에 공개된 중공과 소련의 비밀문건들에 의해 잘못된 논설로 폭로된 커밍스의 수정론을 넘어서, 심지어는 "한국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외세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민족통일전쟁"이라 말하고 있다.
이제 60주년을 한해 앞두고 다시 찾아 온 6.25를 맞이하여, 특히 남한국민이 그렇게도 비참하게 당했던 그 전쟁이 과연 우리민족이 원하는 민족통일전쟁이고 남한해방전쟁이었던가를, 당시의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 특히 스탈린과 모택동 그리고 그들의 꼭두각시였던 북한괴뢰정권(* 6.25전쟁에 관한한 이 용어의 사용은 의미 있다)의 안보전략상과 연합전략작전 그리고 북괴의 남한점령실상을 통해 재인식해 보기로 한다.
6.25는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에 의한 '南侵赤亂'이다
1920년 10월 하순, 만주간도에서는 일본관동군토벌대를 상대로 우리 광복군이 쟁취한 역사적인 청산리대첩이 있었다. 그런데 이 전장에서 우리 광복군의 영웅들(지휘관 ;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최동진 등)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그로 인하여 일본군의 대규모토벌전에 쫓겨 간도전역에서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단 밀산(密山 ; 1910년에 만주와 연해주국경선에 조성된 독립군기지)을 거쳐 이청천장군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단과 함께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공산당의 연합전선구축제의를 받고, 이들 광복군지도자들은 그것이 광복군정신에 맞지 않아 간도로 다시 회귀하였다.
그래서 광복군주류는 간도를 3개정치 및 군관구로 재편성하고 광복전쟁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27년부터는 소위 일본관동군과 만주 장학량 군벌정권의 야합에 의한 독립군토벌작전과 새로이 공산혁명을 표방하는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힘겨운 생존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특히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이제 만주에서 왜적을 앞에 놓고도 ‘민족주의자는 공산당의 적’으로 선포하고 민족주의유지들에게 테러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박용만장군(무력광복전쟁을 주장하던 선구자)을 비롯하여 청산리대첩의 민족영웅 김좌진장군을 1930년 1월에 암살하고, 이청천장군도 위협하였다.
이것은 한국공산주의자들이 광복운동의 민족정신을 잃고 이제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의 한 괴뢰로 전략했음을 의미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북만주지역 민족주의계열 광복군선구자들은 대동단결하여 1930년 7월에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함으로서 남만주의 공산-민족연합계의 국민부(조선혁명군)와 공존하면서 광복전쟁을 계속하였다.
1931년, 일제관동군의 만주침략으로 32년에 괴뢰 만주국이 성립되자 만주인과 한국인들의 항일항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이청천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주로 만주인 항일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는 정식으로 ‘한중연합토군’(韓中聯合討軍)을 구성하여 관동군을 게릴라전으로 농락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간이었을 뿐 한국독립군은 공산당의 와해공작과 관동군의 증강된 토벌전 등등으로 연합작전이 지속될 수가 없었다. 1933년 10월에는 한중연합작전 중 공산당 오열의 간계로 중국 오의성부대가 우리 광복군을 포위 무장해제시키고 이청천장군도 감금하는 불심사태가 야기되자 이를 계기로 한-중연합작전은 파기되고, 광복군 또한 와해되면서 ‘한국독립군’의 광복전쟁은 소멸되고 말았다. 이청천장군도 임정의 김구수반에 의해 구원 되 임정으로 탈출해 감으로서 만주의 민족계열광복군전쟁은 1934년경에 소멸되고 말았다. 한편 남만주국민부 소속 조선혁명군(총사령 양세봉)도 중국자위군과 연합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역시 1936년에 왜군의 모략으로 지휘관을 잃고, 38년까지 버티다가 소멸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제공산주의 혁명운동의 일환으로 실시된 (위장)광복전쟁뿐이었다.
한편 만주성 중국공산당도 1932년에 일제세력이 미치지 않은 지역에 ‘소비에트’를 수립하고 중공만주공산당유격대(1933에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개칭) 를 조직하였는데, 그 중에 주로 한국인거주지역의 유격대가 동․남·북 만주지역일대에서 조직되었다. 이 부대들의 구성원 대부분은 한국인이었고 그 지휘관도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 이제 민족진영광복전쟁이 소멸되고 괴뢰만주국 중국인의 텃세가 심해가는 과정에서 그곳 주민들은 투쟁이념의 공감은 차치하고서라도 실질생존문제가 해결가능한 단체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한인 공산유격대는 중국공산주의자들의 헤게모니장악을 위해 조작된 소위 ‘민생단사건’(1933~5년 ; 일제하 한국인자치정권수립을 모의)으로 대부분 숙청(학살) 당하고, 중공 등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에 충실했던 김일성(이 때 나이 19세)을 비롯 소수요원만이 생존하였다.
1934년, 만주에 들어 온 조봉암이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결성하였으나, 그 직후 코민테른방침에 따라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로 흡수되자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이제 우리민족광복운동보다 민족간에도 계급투쟁중심의 국제공산주의혁명운동을 앞세웠다. 1935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제인민전선(전략정책)’ 즉 소수민족과의 연합에 의한 통일전선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쟁총동원령이 지령되었다(코민테른의 지령 즉 테제는 전세계공산당원에게 ‘신의 뜻’으로 받아드려진다). 이에 따라 중공중앙도 국부군과는 합작전선(실제로 36년 12월에 국공합작달성)을, 그리고 국내 전 소수민족 특히 간도 한인민족과는 ‘한-중 항일연합군’(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만주지역의 조선인 공산당은 우선은 만주지역 중국공산당정권수립을 위해, 그리하여 성립되는 중공동북성정권 밑에 한인자치구(간도조선자치구)를 얻기 위해 중공동북성(만주)공산당의 종속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근거지를 잃었던 제2군 제6사(지휘관 김일성)는 동만으로 돌아와(1936.3) 국경지역(압록강, 두만강, 백두산지역) 밀영(密營)활동을 재개하였다. 그 중 한 예로,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지휘하는 제6사의 60여명 유격대가 함경남도 혜산진의 보천보면(인구 약 1400여명의 소읍)을 습격했던 이른바 북한이 자랑하는 ‘보천보전투’도 있었다.
그런데,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유격대활동에 불리한 1939년 겨울부터 또 다시 본격적인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은 괴멸상태에 빠져 소부대단위로 분산하여 연명을 강구하하던 중, 1940년 3월, 코민테른이 소집한 제2차 만주빨치산 지휘관회의에서 전멸상태인 동북항일연군을 임시로 소련영토로 피난시키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전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제2군 즉 한국인유격부대들도 9월까지 소련령 하바로프스크로 도피 및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곧 하바로브스크 소련군 산하 ‘88 특별여단’으로 재편되었다. 이 부대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연합부대로 소련군예하에 편성되어 - 1944년 9월 현재 총수는 1007명이고, 그 중 조선인은 100명(유격대원 86명 포함)이었다 -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4개지대 중 제1지대가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지휘관은 김일성)되었다.
이제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임정과 광복군 그리고 국내외선구자들이 외롭고 굶주리면서도 심신을 다하여 광복전쟁에 임하고 있는 동안, 이들 김일성계파는 코민테른과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민주주의 조국건설’ 아닌 오로지 ‘스탈린이 지배하는 국제공산주의혁명을 위한 붉은 공화국건설’, 즉 민족의 번영이나 국민(전 계급)들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세계지배를 위해 여타계급을 말살하거나 아래로 지배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가차 없는 반당종파분자의 숙청을 통해 유일독재권을 확보해 나가는 등의 대형주의(大兄主義)세계체제를 정밀하게 음모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미국의 권고에 따라 소련은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만주와 북한에 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을 8월 27일까지 점령해 나가면서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의 극동군사령부(군사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평양에 민정사령부(즉 군정청의 위장명), 각지방에 위수사령부를 두어, 소련정치장교들의 감독과 감시 지도하에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지방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8.27~10.26) 일제로부터 행정권을 인수하게 하는 한편,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정치공작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스탈린은 김일성을 9월 19일에 원산을 통해 북한에 들여보냄과 동시에 20일에는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북한정권수립을 지령’ 하였다.
남한에서는 민주주의통일한국정부를 수립하기위해 어렵사리 국민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동안 북한에서는 일사천리 - 결단코 소련군의 절대적인 통제와 사전계획 없이는 될 수 없는 - 로 건당건국(建黨建國)해 나갔다. 동년 10월 10일, 북한공산당을 비밀리에 창당하고, 10월 14일에는 김일성환영대회 즉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북한공산정권 확인작업을 거쳐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북한단독정권을 발족시켰다. 즉 실질적 국가수반에 스탈린의 김일성, 부(副)자에 모택동의 김두봉 그리고 소련의 허가이가 실세(한국계소련인, 최초 12명으로 장차관 등 고위 요직 차지, 후에 430여명에 이름)를 장악하여 정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감독하는 스탈린의 북한괴뢰정권(스칼라피노교수 왈), 즉 충실한 국제공산주의혁명위성국 하나가 극동에서 성립된 것이다.
한편 해방과 동시에 중공은 중공중앙의 계획대로 8월 11일부터 만주집결/접수를 개시하였고, 동시에 중공조선인 중공영향하의 공산정권수립을 위해 연안파(김두봉, 무정 등)의 간부들을 1945년(~6년) 해방직후부터 1,2차에 나누어, 조선의용군 북한 진입에 앞서, 우선 북한에 입북시켰다. 한편 1945년 8월에 미국권고로 소련은 국부와 만주처리에 대한 조약을 맺었으나 그동안 발 빠른 중공의 행동을 눈여겨 본 소련은 중공을 극동대륙지역의 담당자로 비밀리에 인정하게 되었다. 최근에 나온 David Tsui 박사(St Antony's College. Oxford)의 논문에도 강조된바와 같이 중공은 이때부터 극동의 국제공산주의혁명 특히 한반도의 적화혁명에 대해 스탈린과 적극협조하면서 책임지고 지원하기로 전략사상을 수립하였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연합3국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물론공산주의자도 포함하여 우리 전민족은 반탁으로 총궐기하였다. 그런데 불과 3일 만에 소련의 지령으로 북한은 물론 남한공산주의자들도 곧바로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는 민족에 대한 배반임과 동시에, 분명하게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을 위한 정체가 아니고 바로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1947년에 냉전이 심화되고, 미국의 봉쇄전략으로 그동안의 자유세계에 대한 간접침략이 이제 어렵게 됨을 깨달은 스탈린은 모택동과 김일성과 합의하여 한반도에서 열전에 의한 돌파구를 마련하려하였다. 그리하여 소련군은 만주를 철수하며 이를 국부아닌 중공에 다량의 전쟁물자와 함께 넘겨주고, 북한에는 소련군의 전략전술을 전수시킨후 (고문단을 남기고), 자위능력조차 없는 남한에서 미군철수를 유도하기위해, 자진철수(1948)를 단행함과 동시에 중공으로 하여금 유력한 군사력을 북한에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모택동은 만주를 점령하는 대가로 김두봉에 의한 한반도정권창출전략은 접고 - 그래서 김두봉과 연합했던 남한의 여운형도 박헌영에 의해 숙청되고 -, 우선은 한반도에 김일성정권창출을 위해 만주의 중공군 즉 한인이 주력인 동북인민군부대를, 개별적으로는 46년부터, 부대단위로는 49년부터 김일성의 무장군대로 지원하기 위해 밀입북시켰다.
1947년 10월, 소련은 국제공산주의혁명을 지휘통제하기위해 코민테른의 부활인 코민포름(Cominform)을 설치하고, 미소공위실패와 동시 한-중비밀군사협정을 체결(1948)하여 본격적으로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에 의한 남침을 획책하고 준비하게 되었다. 반면에 이 시점에서도 미국은 공산주의혁명에 대해, 소련이 무력으로 세계적화를 위해 서방 즉 미국에 도전하지는 않을 것이라던가, 중공이 티토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적 오판을 하고 있었다.
북한은 한때 김구-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을 통해서 위장된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남한을 접수해 보려하였으나 실패하고, 또한 남노당의 극열한 반란과 총파업등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성공하지 못하는 가운데 남한에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드디어 그동안 준비해 왔던 또 하나의 적화수단 즉, 무력에 의한 직접침략적화전략을 코민포름의 지령에 따라 실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스탈린과 김일성 그리고 모택동간에 많은 밀사(김두봉과 김일 허가이 등)가 왕래하면서 한반도의 열전(熱戰)을 모의한 뒤, 1949년 3월에는 김일성이 모스크바로 직접 가서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완성하고, 겉으로는 ‘조-소경제문화협정’을, 실제로는 ‘비밀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들로부터 남한침공을 위한 군사력과 경제력지원을 보장받고 1950년까지 소위 ‘2개년경제계획’ 즉 실제로는 ‘남침계획’을 수립하여 6.25南侵赤亂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1949년 상반기부터 중공(만주)조선인부대를 본격적으로 밀입북시킴으로서 이들이 바로 남침북괴군의 주력이 되었다. 특히 중공정권이 성립된(1949.10) 뒤 스탈린이 곧바로 ‘아시아에 대한 중공의 패권’을 다시 인정하자, 모택동과 김일성은 동년 12월(스탈린생일)에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과 다시 한 번 남침계획과 그 지원사항등을 확인하였다.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드디어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에 의한 직접침략 즉 냉전에서 열전으로의 길로, 김일성괴뢰집단에 의한 대한민국침략을 지령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6.25전쟁은 결코 민족통일전쟁도 남조선해방전쟁도 아닌,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의 계획에 의하여 김일성괴뢰집단이 대한민국을 침략하여 일으킨 [6.25赤亂]’인 것이다. 이 논리는 필자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세계가 공인하는 ‘정통적 6.25전쟁관’인 것이다.
북괴의 잔혹하고도 분열고착적이었던 남한점령정책
남침후 불과 3개월간이었지만 남한의 90%이상을 점령한 북괴는 공산당과 인민위원회조직를 재건하고, 친일파나 경찰/공무원을 포함한 우익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학살)하면서, 소위 의용병을 비롯한 전시동원 그리고 현물공납세제를 비롯한 토지개혁 등의 악정을 남한국민에게 강요하였다. 그들의 숙청행위는 우리가 최근 중공의 문화혁명에서 보아 잘 알고 있는 '홍위병'의 그것보다 더 하였다. 그리고 후퇴하면서도 요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하거나 북으로 납치해 가는 등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당시 남한은 망할 수밖에 없었던 월남이나 지금도 혼란스러운 필리핀하고는 달리 이미 이승만정부에 의해 그런대로 만족스럽고 합리적인 농지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소농화 된 신 지주들은 소유권을 행사하면서 이제 막 민주주의의 맛을 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대했던 반란은 물론 없었다. 그런데 북괴의 소위 국민사상개조와 토지개혁정책은 새삼스럽게 분배에서 빠진 고농(머슴)이나 적게 분배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분배를 강요하는가 하면, 동시에 상환방법중에서도 가장 바람직하지 못해 남한에서도 이미 폐지하게 된 현물세제(옛날 악명 높았던 공출供出과도 같은)를 실시하려고, 집집마다 가장 잘된 벼이삭을 헤아려 그것을 기준으로 현물세를 부과하였다. - 그나마 다행하게도 수확기이전에 후퇴해 감으로서 민족적 재앙 한 가지는 면할 수 있었지만 -.
전선이 다시 38선 남북에서 고착되어 가던 때인 1951년 6월 20일이 되자 전사자 21625명, 전상자 72868명, 실종자 71915명이나 누적되었다. - 6.25 총피해 ; 민간인 100만, 국군 100만, 유엔군 16만명 - 그래서 그 날, 부산동래에 있는 동래고등학교(당시는 육군종합학교)교정에서는 전후 최초의 '현충일행사'가 있었는데(필자도 고등학생으로 참석) 이때 이승만대통령과 함께 분향하던 전쟁미망인과 그 부모들의 곡성이 전 남한국민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6.25가 과연 남한해방전쟁이고 민족통일전쟁임을 증명하려고 그들이 그렇게 울부짖은 것이었을까.
통일에 앞서 북한의 민주화를!
이러한 6.25적란을, 과연 우리 국민들과 농민들이, 우리 남한사람들을 위한 해방전쟁이요 민족통일전쟁이라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이나 친북주의자들의 착각이요 오류이다.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지구상의 침략전쟁은 인류에 대한 죄악인터에 더욱이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의 사주에 의한 북한괴뢰의 6.25남침은 동족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분명한 [6.25南侵赤亂]이었다.
사실(史實)이 이러함에도 6.25를 민족통일이라 주장한다는 것은 최근에 '4.3 제주도 무장폭동사건'을 마치 '핍박받은 도민들의 무장봉기'라 말하는 것과 같은, 이념적 환상에 사로잡힌 좌파와 종북주의자들의 궤변이다. 지금 우리의 조상과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통일이전에 북한의 민주화가 우선이란 것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겠다.(konas)
문영일(예.육군중장, 군사연구원연구위원, 전 육본작전참모부장/국가비기위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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