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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노병의 6.25> 어프 前남아공 공군총장

"정말 끔찍했지요. 혹한에 여름옷을 입고 압록강 근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도중에 숱한 주검을 목격했습니다."
Written by. konas   입력 : 2010-05-06 오후 2: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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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끔찍했지요. 혹한에 여름옷을 입고 압록강 근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도중에 숱한 주검을 목격했습니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포로가 있으면 곧 총성이 들렸어요. 그걸로 끝이었지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2년 가까이 포로생활을 했던 데니스 존 어프(79.예비역 공군 중장)씨는 지난달 29일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한국대사관에서 기자와 만나 당시의 끔찍했던 경험을 회고하며 치를 떨었다.

   어프 씨가 포로가 된 것은 한국전 참전 4개월 만인 1951년 9월27일. 1.4 후퇴 이후 다시 서울을 수복한 뒤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정전 회담에 들어간 시기였다.

   당시 어프 씨는 4대의 무스탕 편대를 이끌고 교량 폭파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하던 중 대공포화에 맞아 전투기를 버리고 개성 인근 임진강 북쪽의 적진에 낙하한 뒤 임진강 남쪽 아군 지역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낙하 중 다친 다리로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려 23개월 2일간에 걸친 고난의 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중공군의 포로 심문을 거쳐 어프 씨가 향한 곳은 평양 인근의 포로수용소. 포로들 사이에 `박(朴)의 궁전'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박 소령'이라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인민군 장교가 책임자로 있던 수용소로, 이곳에 3주간 수용돼 있는 동안 동료 유엔군 21명 가운데 7명이 고문 등 온갖 가혹 행위로 목숨을 잃었다.

   평양 근처 강동의 탄광 포로수용소에 잠시 머물던 어프 씨는 그해 11월 혹한 속에 다른 포로들과 함께 압록강 인근의 중공군 포로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야말로 처절한 `죽음의 여로'였다.

   "몇 날 며칠을 걸어서 가는데, 다들 여름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추위를 느꼈다. 게다가 눈까지 내렸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거나 낙오된 포로들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우리에게는 사망자들을 묻어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프 씨는 1953년 8월3일 포로교환으로 풀려날 때까지 이곳에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미 전범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은 터여서 죽음의 그림자가 늘 주변에서 맴돌았다.

   중공군이 `당장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겠지만 사형 여부는 당신의 행동 여하에 달렸다'고 협박을 일삼았던 것.

   게다가 하루에 죽 두 그룻만 배급될 정도로 처우가 열악한 가운데 오염된 물을 그냥 마시다 보니 설사병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겨야 했다.

   영하 40도로 떨어지는 한겨울 혹한 속에 손발이 꽁꽁 묶인 채 흙구덩이 속에 동사 직전까지 방치되거나 발가벗긴 채 양동이로 물세례를 받는 모진 고문도 당했다.

   이곳에 수용된 미군, 영국군, 터키군, 네덜란드군, 프랑스군, 필리핀군, 호주군 등 동료 유엔군과 국군 장병도 같은 처지였다.

   어프 씨는 "불과 몇㎞ 떨어진 `캠프 5' 포로수용소에서는 그해 겨울에 포로 1천5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어프 씨는 포로 교환으로 석방된 뒤 공군에 복귀, 1984년부터 4년간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뒤 3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예편했다.

   그는 "사람들이 `한국전에서 얻은 게 뭐냐. 승전이 아닌 휴전이니까 결국 적에게 패배한 게 아니냐'고 내게 묻곤 했다"면서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고 자신이 갖는 한국전의 의미를 강조했다.

   "한국을 보라. 한국은 지금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민주화를 이뤘으며 국민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그들은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생존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우리가 승전을 못한 것이라면 분명히 성취한 것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한국 국민은 지금 잘하고 있어요. 지금 하는 대로만 하면 돼요. 그렇지만 인내를 가져야 할 겁니다. 통일은 아주 긴 시일이 요구될 테니까요."
남아공은 한국전이 발발하자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 호주에 이어 세번째로 조종사와 지상요원을 포함, 연인원 801명의 공군 전투비행대대와 34명의 육군 병력을 파병했다.

   `나는 치타'(Flying Cheetahs)라는 별칭을 지닌 남아공 공군 제2 비행대대는 조종사가 75회 출격을 기록하면 귀국시키고 다른 조종사로 대체해 가면서 적 화력 및 시설물 파괴, 유엔 지상군 지원, 정찰 등의 작전을 수행했다.

   대부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지닌 남아공 조종사들은 한국전에서 탱크 44대와 차량 900여대를 파괴하고 후방 보급선을 차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종사 34명 등 총 36명이 전사.실종되는 희생을 치렀으며, 어프 씨를 포함해 8명은 포로로 붙잡혔다가 휴전과 함께 풀려났다.

   이들 참전 용사 가운데 상당수가 외국에 나가 살거나 고령으로 사망하면서 남아공에는 현재 90여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연합)

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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