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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무너졌다!

동독 공산당 간부의 誤報가 역사를 앞당겼다.
Written by. 조갑제   입력 : 2014-11-10 오전 9: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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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의 東歐(동구) 민주화 혁명에 뇌관 역할을 한 것은 한국과 맨 먼저 수교한 헝가리였다. 헝가리는 1956년의 민중봉기로 공산당 정권 타도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소련군의 침공으로 좌절되었던 나라이다. 실패한 봉기 뒤, 헝가리 공산당, 즉 사회노동당의 당수인 카다르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면서도 시장개방 정책을 폈다. 鄧小平(등소평) 이전에 이미 헝가리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운영했다. 헝가리의 생활수준은 공산권에서 항상 최고였다. 헝가리 민중봉기를 武力으로 진압하여 수만 명을 죽인 데 대하여 죄책감을 느꼈던 소련도 헝가리의 이런 자유화를 허용했다.

 한국-헝가리 수교를 주도했던 회른 국무장관(나중에 총리)과 미클로스 네메트 총리는 東歐(동구) 민주화 혁명의 뇌관을 터뜨린 인물이다. 자유노조가 주도한 폴란드의 민주화와는 달리 헝가리의 민주화는 공산당 내 개혁파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1988년 5월 서기장 카다르를 몰아낸 헝가리 공산당의 개혁파는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과도기적 정부를 구성했다. 공산국가로선 처음으로 한국과 수교를 결단한 그룹도 이들이었다. 네메트 총리는 소련으로부터 민주화 개혁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1989년 3월 모스크바로 간 네메트는 고르바초프에게 민주화의 계획을 설명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소련군이 8만 명 주둔하고 있습니다. 소련은 1956년에도 개입한 적이 있습니다. 자유선거가 언제 치러질지는 모르나 그 선거에서 공산당이 져서 정권을 넘겨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소련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고르바초프는 “나는 헝가리가 복수정당제를 채택하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귀하가 할 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결정적인 말을 덧붙였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權座(권좌)에서 쫓겨나지 않고 이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다면 헝가리의 민주화를 진압하라는 명령이나 지시는 없을 것입니다.”

 誤報(오보)로 무너진 베를린 장벽

 네메트는 고르바초프로부터 武力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셈이다. 공산당의 개혁파들은 자유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그 시작은 사소했다. 헝가리계(系) 루마니아 사람들이 차우셰스쿠의 壓政(압정)을 피해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헝가리는 이들을 루마니아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東獨(동독)사람들이 헝가리 정부의 이 조치를 유심히 관찰했다. 헝가리는 동서독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헝가리에 들어온 東獨(동독)사람들이 체류기간을 어기고 계속 머물기 시작했다.

 이해 여름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철조망 국경선을 개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9월 말까지 4만 명 이상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갔다. 동독인들의 대탈출 사태가 유럽 全域(전역)에서 벌어졌다. 동독사람들이 외국 공관으로 들어가 西獨行(서독행)을 요구하면 서독이 이들을 다 받아주었다.

 이제 불똥은 東獨(동독) 내로 튀었다.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의 시위는 동독 공산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네커 정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호네커 정권은 이 시위를 武力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이에 자신을 얻은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10월9일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진 대시위가 전환점이었다. 전날, 東獨 비밀경찰 슈타지는 약 8000명의 병력과 민병대 및 정규 경찰병력을 배치해 이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진압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東獨주재 소련 대사 바체슬라브 코체마소프는 동독 공산당 간부 크렌츠가 전화를 걸어와 “호네커 서기장이 군 지휘관들에게 라이프치히로 내려가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지시했다”고 알려오자 “군대 투입은 절대 안 되고 강제진압에 반대한다”고 말하고는 동독 주둔 소련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라이프치히 사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호네커 서기장에 반기를 든 동독 공산당 간부들은 라이프치히 시위 진압을 포기했다. 곧 크렌츠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 간부들이 黨內(당내) 쿠데타를 일으켜 호네커 서기장을 축출했다. 이들은 호네커 추방에 대하여 소련 고르바초프의 사전 양해를 얻었다.

 에곤 크렌츠 서기장의 동독 공산당은 민주화 시위를 달래기 위하여 여행자유화법안을 만들었다. 동서독 국경선 어디에서든 여행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1월9일 귄터 샤보우스키라는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이 국내외 기자들에게 뉴스 브리핑을 해주고 있는 가운데 이 여행자유화 법안의 내용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서기장 크렌츠는 그날 다른 일로 바빴다. 이 법안 메모엔 구체적인 여행자유화 규칙은 全國의 공안당국에 통보한 이후인 11월10일에 발표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前後(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샤보우스키는 이 메모를 무시하고 텔레비전 카메라를 향해서 “여행자유화 조치가 이 순간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된다. 여행신청을 하면 즉각적으로 허가될 것이다”고 발표하고 퇴근해 버렸다. 이 발표에 흥분한 동베를린 시민들이 西(서)베를린으로 건너가려고 장벽을 지키는 국경초소로 몰려갔다. 초소 경비병들은 아무런 사전 지침을 받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몰려드는 시민들에게 발포할 수도 없었다. 경비초소 지휘관은 베를린 장벽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 웃기는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크렌츠 서기장은 誤報로 빚어진 이 사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통제불능이 된 사태가 마치 자신들이 미리 결정해서 내린 자유화 조치의 결과인 것처럼 선전했다. 동독주재 소련대사는 “여행자유화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 더구나 베를린은 미국·소련·영국·프랑스가 공동관리하고 있는 곳인데 왜 멋대로 개방하느냐”고 항의했으나 군중들은 베를린 장벽을 부수고 있었다. 역사가 정권을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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