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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적지 답사 대학생 국토대장정 소감문 ①

[최우수작]대중속에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으로 거듭나야 겠다
Written by. 김보금   입력 : 2008-08-04 오후 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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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때 이고 엎고 피난다닌 어머니가 아닌 강한 여군으로 거듭날터 -

6월 25일

 아침부터 장충체육관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남녀 대학생들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학교도 고향도 나이도 제 각각이었지만 서로 언제 왔느냐, 뭐를 가져왔느냐고 묻는 투가 오랜 친구 같았다.

 출정식에 앞서 우리는 장충체육관을 찾으신 6.25 전쟁 참전 용사님들과 인사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군인다운 면모가 풍기시는 참전용사님들은 한참이나 어린 후배들을 기특하게 봐주시며 거수경례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한편으론 여학생들도 천리 길을 간다는 데 놀라시면서 걱정도 해주셨다.

 우리 순례단은 남녀 대원 100명 중에 여학생이 40명이었다. 오히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여학생들이었다. 나는 마른 몸에 체력도 건강도 그리 썩 좋지 않았지만 전적지 순례를 위해 두 달 전부터 시간 날 때마다 운동을 했다. 나는 기꺼이 4학년 마지막의 방학을 전적지 순례에 걸었다. 나는 강하다. 내년이면 여군이 될 나에게 전적지 순례는 더할 나위 없는 입문과정이었다. 나의 투지, 열기, 끈기, 정성, 기백을 태워 천리를 가는 동안 인격과 체력이 단련되리라. 그리고 이제는 바로잡힌 국가관의 초석을 세우리라. 나는 여학생 대표이자 언니로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아무런 사고 없이 모두 함께 완주할 수 있길 기도했다.

 ▲ '충성! 국토대장정을 명 받았습니다'. 6월 25일 오전 장충체육관에서 정일훈 단장이 출정식에서 신고를 하고 있다.ⓒkonas.net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6.25 전적지 순례 국토대장정 출정식이 시작되고 출정보고에 이어 남학생대표 강도완대원(21)과 씩씩하게 출정결의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군악대의 연주와 많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9박 10일의 전적지 순례가 막을 올렸다. ‘우리들 모두 잘 해내고 오겠습니다. 강인한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출정식이 끝나고 국립서울현충원으로 향했다. 첫 우리들의 순례지, 국립현충원에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국하신 6.25 전쟁 참전용사들뿐만 아니라 해외참전용사들과 베트남전 용사들이 잠든 곳이었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조국수호를 다짐하며 참배를 올렸다. 위패봉안관에는 6.25 전쟁 당시 전사했으나 시신을 찾지 못한 10만 4천여 용사들이 까만 오석에 새겨져 있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으랴, 영현승천상 아래 잠든 6천 2백여 명의 무명용사들까지, 그분들이 계셔 지금의 민주주의가 있음을, 대한민국이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풍족하게 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6.25 전쟁 당시 끝까지 싸웠다던 어린 학생들의 이름도 보였다. 대부분은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바로 그날 돌아가셨다. 우리가 갔을 때 찾아온 유족들이 많았다. 위패들 사이로 편지 하나가 보였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어린 자식과 함께 미망인으로 남았을 그녀, 목숨은 건사했지만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을 슬픔, 그리고 그런 아내를 두고 용사는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는 아내와 함께 하늘에서 편안하길. 영현승천상은 하늘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프랑스 참전비를 찾았다. 여기저기 잡초가 무성해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 없는 머나 먼 타국에서 처음 오직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용사들. 프랑스를 비롯한 수많은 UN군이 6.25 전쟁으로 죽어갔다. 미국인 다음으로 월드컵 때 함께 응원해 형제애를 보였던 터키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함께 싸워준 UN군이 있어 우리는 나라의 주인으로서 이 땅 위에 살고 있다. 휴전이 되고 이제 한국은 다른 나라들을 도와주고 있다. 세계가 놀라도록 성장한 한국. 우리는 6.25 전쟁과 희생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존귀해야 하며 또한 세계평화를 위해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세계는 서로 도우며 협력해나가고 있다. 또 다시 한국의 위기가 닥쳤을 때, 몸을 아끼지 않을 용사들의 피땀이 이어질 것이다.
 
 수원을 지나 수원 공군 부대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던 식사는 ‘군대리아’(햄버거식)였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먹어보게 될 줄이야. 배고팠던 마음에 식판 가득 고기와 빵을 채웠다. 하지만 닭을 통째로 넣고 만들었다는 고기를 놔두고 빵에 쨈만 발라 먹었다. 왠지 찝찝한 기분. ‘누나 나는 두 개는 못 먹겠더라. 닭머리도 닭발도 통째로 넣어 갈았어.’ 그래도 가득 가져온 음식인데 먹어야겠다 싶어 닭고기를 넣고 오래오래 꼭꼭 씹어 먹는데, 웬걸, 이에 딱딱하게 부딪히는 이것은 무엇인고. 꺼내보니 닭발톱처럼 생긴 것이 나왔다. 나는 더 이상 먹지 못했고, 먹은 것들도 거북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멋진 여군이 지나갔다. 반짝이는 눈빛과 곧은 허리, 씩씩하게 걷는 모습이 너무 늠름해 보였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힘들고 위험한 길을 가는 그들. 그리고 정말 버리는 것 하나 없이 국민의 세금을 소중히 생각하는 군대. 닭으로 만든 군대리아를 일주일에 두 번이나 먹는다니. 나는 오히려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처럼 자신보다 나라와 국민을 아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사실 작은 뼈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찝찝한 마음에 너무 잘근잘근 씹어 먹었기에 나온 것일지도. 음식물을 많이 남긴 내가 부끄러워졌다.

 처음으로 부대 막사에서 잔 날, 비행기 소리에 몇 번이나 깨면서 여기가 어디지 하고 깜짝 놀라며 첫날밤을 보냈다.

6월 26일
 6.25 전쟁 당시 UN군의 첫 전투를 기념하여 세운 UN군 초전비. 이곳 죽미령 전투에서 UN군은 북한군을 너무 얕잡아 보아 당했다고 한다. 쉬는 시간마다 양말을 벗어 털고, 배낭 위에 다리를 올리고 발가락을 주무르고 사이사이 파우다도 뿌려준다. 이렇게 해야 다음번에 다리가 편하고 발바닥이 덜 아프다. 힘들어서 푹 펴져 있다 보면 다시 걷기가 힘들어 진다. 6.25 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남은 지금, 우리는 방심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북한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지 않는가. 안심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 순례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저녁 시간이 지났지만 부대는 보이지 않았다. 순례기간 중 가장 발바닥이 아팠던 시간이었다. “발 아파”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한 발작, 한 발작이 몽둥이로 맞는 것 같았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아픔에 두려움을 안고 발만 보고 걸었다. 배낭도 갈수록 무거워지고 모두 다 버리고 가고 싶었다. 배낭만 없으면 훨훨 날아갈 텐데. 바닥에 붙은 달팽이 마냥 발걸음은 무겁고, 몸은 금방 녹아내릴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걸어왔는지, 또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가늠해 볼 수도 없었다.

 고개를 들자 넓게 펼쳐진 논, 과수원, 길게 이어선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는 바람도 느껴졌다. 자주 기차를 타고 지나던 이 길이었는데. 저 곳에 내가 전에 점찍어 두었던 곳이었던가. 시인들의 보금자리,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처음 며칠이 힘들다던데 오늘만 참으면 10일도 금방일 거야. 교통정리를 해주시던 경찰아저씨, 나와서 얼음물을 채워주시던 식당 아줌마, “파이팅”을 외치시던 할아버지, 모두모두 고마운 분들, 덥고 지쳐서 배낭도 버리고 누워버리고 싶지만 이것도 다 의미 있는 고통일거야. 천리를 걸은 여자가 몇이나 될까. 나는 특별한 여자야.  
 
 부대에는 저녁 8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방공포 부대 소개가 이어졌다. 내 꿈은 나라를 지킬 무기와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국방연구소에 들어가기 위해 군대에도 관심을 가지고 전진 중이다. 여군 생활도 하면서 군대에 대해 배우고 군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 계획을 세워 공부해 나갈 것이다. 어마어마한 가격의 비행기, 미사일을 수입하느라 국방비를 나가고 있지만 아직 종전하지 못한 우리나라에게 정의를 위한 무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에 우리 스스로 더 좋은 무기를 개발한다면 전쟁도 막고 한국의 경제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지난 세월 약자로서 지배당하고 분단되고 전쟁이 일어나고 불합리하게 협약한 일들을 생각해보면 이제는 세계 평화와 대한민국을 위한 ‘레드카드’를 준비할 때다.
 
6월 27일
 장기자랑이 있는 날이다. 걷는 내내 “장기자랑 뭐 하지?”하는 이야기가 몇 번이나 이어졌다. 다른 날보다 일찍 입소해서 분대마다 장기자랑 준비를 했다. 사실 장기자랑 때보다 준비하면서 보낸 시간이 더 재미있었다. 우리끼리 준비하면서 얼마나 웃어댔는지 그 동안 힘들었던 피로도 날아가고 한층 더 친해진 시간이었다. 우리가 만든 장기자랑은 코미디 프로에 나오는 ‘달인’이었는데 각자 달인과 수제자를 맞고, 담당스텝도 참여해 사회자를 맡았다. 강훈대원(22)은 물구나무서기에 이윤정대원(22)은 여기저기를 굴러다녔다. 겉보기엔 얌전하기만 한 김진철대원(22)도 얼마나 재치있던지. 모두들 아이디어를 내고 대본도 짰다. 권미리대원(21)과 이슬기대원(22)은 배낭을 개고 김회권대원(19)은 몸에 빨래집게까지 꽂았다. 나는 배낭을 5개 맸다. 걱정도 많이 했던 장기자랑이었지만 모두들 잘 해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배도 볼록하게 만들었는데도 호응이 적어 아쉬웠지만 모두가 함께 참여했던 장기자랑이라 의미 있었던 추억이었다.

 ▲ 이 순간은 오늘 하루의 힘들었던 순간들도 봄 눈 녹듯 사라지는 시간입니다. ⓒkonas.net

6월 28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젖은 우의를 쉴 때마다 털어냈다. 순례일정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거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쉬는 곳에 다다르면 땅바닥에 철퍼덕 앉기도 자연스러워지고 아무데나 눕기도 했다. 냄새나는 발을 마사지한 손으로 얼굴에 땀도 닦고 수박도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이제 들어오는 대원들의 땀으로 먼지로 뒤덮인 몸에서 쉰내가 풀풀 날렸으니 누구도 예외 없었다. 예전 같으면 땀이 얼굴에 조금 흘러도 못 견뎠을 텐데, 땀과 빗물로 우의가 저벅저벅 달라붙는데도 불쾌하지 않았다. 한데 그러는 동안 종아리에 풀독이 생겨버렸다. 종아리 전체에 붉은 반점은 볼록 올라와 가렵기까지 했다. 대원들이 안 씻어서 그런 거라고 하는데 나만 생긴 건 내가 제일 안 씻어서였을까.
 
 발걸음 하나하나에 집중했던 나는 이젠 아예 통증을 잊고자 옆에 가던 최민식대원(25)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6.25 전쟁에 대해 모르는 거지? 그런 건 학교 안 가르쳐 주는 거야?” 분명 내가 커오면서 교과서도 바뀌었다. 지금 중학생인 내 동생은 6.25 전쟁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내 몸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6월 29일
 계룡대 방문은 우리에게 행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정말 모두들 감탄을 자아냈다. ‘계룡대 입성(入城)’이란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에 들어가기 위해 가는 길도 그만큼 쉽지 않았다. 계룡대 고갯길은 그 동안의 길 중 가장 난코스였다. 구불구불 계속 이어진 오르막길. 우리 모두를 깊숙이 껴안은 계룡산의 고갯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힘들어도 여기 너무 예쁘잖아.’ 하며 위로하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 꺼내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오르막길의 배낭은 천근만근이었다. 처음부터 몸이 약해보였던 이윤정대원(22)이나, 키가 172cm나 되는 권미리대원(21)이나 다들 너무 힘들어했다. 우리 힘내야지, 계룡대가 코앞이야. 다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재향군인회 박세직 회장님도 우리와 발걸음을 함께 하고 계셨다.

 우리는 악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고 파이팅이 계속 이어졌다. 한국의 정기가 모인다는 계룡산, 울창한 나무들 사이사이로 목청껏 지르는 소리들이 퍼져나갔다. 그 때 갑자기 우리의 행렬이 이어진 도로를 따라 땅이 갈라졌다. 그리고 계룡산에 산다는 커다란 용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큰 용은 머리는 보이지 않고 몸통만 오르막길 따라 길게 이어졌다. 이제 곧 계룡대야. 주룩주룩 흐르는 땀을 딱지도 않고, 국토순례의 절정을 여름날 초목의 푸르름만큼이나 젊은 기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오르막길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무들의 갈라진 틈 사이로 국방의 중추, 계룡시가 펼쳐졌다. 전체 시민의 반이 군인가족인 만큼 계룡대의 규모가 엄청날 법도 한데 계룡산 품에 안겨 아직 용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계룡산은 북한으로부터 국방의 도시를 알을 품듯 보호하고 있었다. 예부터 그 명성이 이미 알려진 천혜의 명산, 계룡산, 군사 요충지로서 최적인 이곳에 육해공군의 본부가 있다. 더욱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계룡산이었다.

 이제는 한숨 돌리며 내걷는 내리막 길, 곧잘 쉽게 보는데 쉬운 길이 아니다. 진이 빠진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다 보니 앞꿈치와 뒤꿈치가 함께 닿는데다가 자칫 발바닥이 내리막길 따라 쓸리다 보면 물집의 위험은 더욱 크다. 무릎에 더 힘주고 조심조심 살살 걸어야 한다. 처음부터 발걸음에 신경 쓰고 걸었던 탓에 나는 국토순례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물집 많이 잡힌 분대원들, 잘못된 발걸음에 상처도 생기는 것이다. 이미 생긴 물집은 6.25전쟁처럼 아물 때까지 한발자국 내디딜 때 마다 치명적이다. 물집이나 전쟁이나 생기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내가 분대원들마다 유심히 살펴보고 강조한 것이 발걸음이다. 다들 아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외려 뒤꿈치와 앞꿈치가 함께 닿아 걷는 분대원들이 많았다. “뒤꿈치부터, 하나, 둘, 셋, 넷” 비록 우리의 무게를 다 받치고 있는 발일지라도 그 모양이 어떤지 자기 발걸음은 알기 힘든가 보다. 혼란스러운 한국,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로 보고 있는가.

 중학교 시절, 사회선생님은 어린 우리에게 소설이야기를 하며 반미주의를 심어주셨다. 어린 나이에 심어진 이념은 무심한 발걸음 습관처럼 오래도록 남았다. 이제는 뉴스 뿐 만아니라 재미로 보는 드라마에도 이데올로기는 숨겨져 있다. 보기에는 내리막길이 좋아보여도 치명적인 내리막이다. 우리는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는가. 거기에 분노할 수 있는가. 쉽게 보이는 것은 쉽게 학습되어 퍼져나간다. 발모양의 아주 작은 차이지만 한 발작 한 발작이 모여 천리를 가는 동안 그 차이는 뚜렷해졌다.

 그 때 옆에 있던 김회권대원(19)이 “윤정이 누나 어디 아픈 것 같아요.” 하고 다들 일제히 뒤를 돌아보니, 숨이 답답한지 가슴에 손을 얹고 울 것 같은 얼굴로 힘겹게 걷는 이윤정대원(22) 보였다. 모두들 배낭을 받쳐주다 안되겠다 싶어, 강훈대원(22)이 받아 앞으로 맸다. 우리 분대 누구도 절대로 낙오되지 않길 기도했다. “윤정아, 네가 누구보다 힘들겠지만, 그만큼 얻는 게 많을 거야. 윤정이 갈 수 있지?” “네, 갈 수 있어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다부진 깡다구가 있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물 한 모금 보내며, 응원했다.

 드디어 계룡대 입성, 입구부터 넓은 도로가 직선으로 좍 이어졌는데, 차가 아주 한참이나 달려간 곳에 용의 머리인 커다란 본부 건물이 보였다. 이제는 뒤로는 군악대가, 우리들 사이로는 장군님들이 함께 걸었다. “힘들지 않나?” 물으시는데, “네, 괜찮습니다.”라고만 대답했다. 사실 계룡대를 보는 순간 지금까지 고통도 흥분으로만 남아 최대한 멋지고 씩씩하게, 얼굴엔 미소 가득, 그러고 있는 중이었다. 한명의 낙오 없이 모두 함께 입성할 수 있었기에 느낄 수 있는 기분이었으리라.

 엄청나게 큰 계룡대, 다들 이런데서 일하고 싶다 난리였다. 계룡대에는 병원도 있어서 모두들 캠프파이어를 하러 간 사이 나는 풀독을 진찰 받으러 갔다. 돌아오는 길, 계룡대의 밤은 전갈자리, 백조자리, 큰곰자리 모두 모여 별만 가득 했다. 별들이 마중 나온 날.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 국토순례를 신청할 당시도 출발할 당시도 몰랐다. 경쟁만 하며 살아온 사회, 나 자신과의 싸움을 경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분대원들이 함께 했고, 이렇게 국가도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막중한 책임감 느껴졌다. 이제는 대중 속의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나라의 주인으로서 나로 거듭나고 있었다.

6월 30일
 어딜 가거나 우리를 반겨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이 주신 수박과 간식은 더운 몸을 서늘하게 만들어 줄 정도였다. 순례 기간 동안 지금껏 먹어본 수박보다 훨씬 더 많은 수박을 먹어 봤다. 더운 날에도 마중 나오셔서 격려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표한다.

 국악의 고장 영동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응원공연까지 있었다. 이곳 어르신들이 나오셔서 장구와 북을 매고 풍물공연을 해주셨다. 배낭을 메고도 나도 한껏 춤을 추었다. 중학교 때 사물놀이를 배운 적이 있는데 아직도 ‘나의 특기’이다. 오랜만에 듣는 풍물소리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꽹과리, 북, 장구, 징을 하나씩 빌려왔다. 악기들을 벌려놓자 예전에 조금 배웠다하는 대원들이 하나둘씩 나와 악기를 잡았다. 배우기를 다 따로 배웠어도 우리가락은 우리가락인가보다. 모두들 한데 어우러져 신명나게 놀았다. ‘덩덕더쿵덕’ 쌓인 피로도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맑은 하늘로 높이 날아가 버렸다. 우리의 전적지 순례로 대한민국에 풍년이 들길.    

 ▲ 10분간의 달콤한 휴식시간. 발바닥은 갈라지고 찢어지는 고통이 있지만 동기들과 함께 하기에 우리는 하나입니다. ⓒkonas.net

7월 1일

 발바닥도 아프고, 배낭도 점점 무거워져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은 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분대원들이 모두 침울해 있을 때였다. 한번은 우리 분대원들이 잘못한 일에 다른 스텝이 우리 담당스텝에게 다짜고짜 화내는 일이 있었다. 분명 분대원들이 맞을 화살이었는데 분대원들을 옆에 세워두고 나이 어린 담당스텝에게 분풀이를 한 것이었다.

이제 막 1학년 입학한 담당스텝은 울음을 터트렸고 혼자 뛰어 나갔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내 몸은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왜 이 단체에 속에 있는가., ‘왜 걷고 있나’, ‘당장 그만 둬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몸이 무너지는 건 금방이었다. 분대원들 모두 담당스텝에게 미안하다며 고개 숙이고 걷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3분대만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었다. 이 어둠을 반드시 깨야만 나도 분대원들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떼지 않는 동안 긴긴 생각들이 흘러갔다. ‘우리 모두 배우러 이곳에 왔다. 책임감을 가져야 할 스텝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모두가 우리에게 경험이지.’ 이 모든 일이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금방 비가 올 것 같은 이 냉랭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서로가 잘되어야 힘이 나는 법입니다. 서로 좋은 관계가 되길 서로 도움이 되길 노력해야죠. 스텝들도 서로서로 북돋아주세요. 스텝들도 모두 배우기 위해 온 것 아닙니까. 모두가 화해하길 바래요.” 스텝들과 우리 3분대는 함께 파이팅을 외쳤다. 마음 속 깊은 골은 풀어 없어지고 모두가 경험이 되어 전보다 더 빛이 나는 순간이었다.
 
7월 2일
 부대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식사를 했다. 식당 한 켠에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발가벗은 아이가 울며 뛰어오고 뒤에는 북한군들이 총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소녀의 절규. 누나의 옷은 벗겨져 버렸다. 어린 동생은 울었다. 장난스런 어른들의 표정.
 나라를 지키리라. 내 누이와 부모를 지키리라.

 부대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 요 며칠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남자친구와 동생,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만 여자라면 정작 자신은 군대에 대해 경험해보기 힘들 것이다. 이제는 저절로 6시가 되면 눈이 떠지고, 군대리아도 맛있어 졌다. 입대가 의무는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우리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전적지 순례를 하면서 출발하기도 전에 여학생들이 애교를 피우며 남학생들에게 짐을 얹어주는 것을 몇몇 보았다. 남학생들이 친절을 베풀기도 전의 강요였다. 모두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인데, 남학생들은 모두같이 물리치지 못했다. 모두들 공주였다지만 순례를 왔으니 이제는 스스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6.25 전쟁 당시 아이들을 이고 업고 천리 길을 피난 간 어머니들이 있었다. ‘강한 육군’처럼 ‘강한 여자’도 필요하다.

 우리 분대 김이래대원(22)은 겉보기에 연약해 보였지만 항상 씩씩하게 걸었다. 나나 우리 분대 여학생 남학생 모두 그녀 덕에 스스로 힘을 내서 갈 수 있었다. 몇 번이 기운이 빠져 있을 때에도 앞에서 힘들다는 기색 없이 걷는 그녀를 볼 때면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다. 원래 약한 사람은 없다. 내가 어떻게 마음먹고 행동하느냐에 달렸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식사와 함께 수박이 나왔다. 식당 한편에는 장병 두 명이 서 있었다. 아마 식사 후에 정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나이도 내 동생쯤 되는 듯 했다. 이제 막 입대해서 이등병인 내 동생, 더운 여름날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까. 누나 걱정인 동생, 항상 내게 양보만 해온 내 동생. 내가 이렇게 강해지려고 하는 건 혼자 군대 간 동생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수박을 집어 일병인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사코 밀어내는 걸 “제 동생도 군대에 있어요.”하며 쥐어주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는 걸 겨우 꾹 참고 태연히 돌아섰다. ‘성룡아, 봐, 누나도 강하지?’

7월 3일
 드디어 내 고향 가산면 다부동에 이르렀다. 그날따라 푹푹 찌는 더위에 오르막길이 이제까지는 아무것도 아닌 듯 끝도 없었다. “이거, 추풍령보다 더 심한데?”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던 나였기에 “얼마나 더 가야되나”고 묻는 대원들 물음에 “금방금방”이라고 대답했지만, 걸어가기는 처음인지라 그 말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참으로도 긴 오르막이었다.

 그래도 난 여기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았기에 충분한 오르막길이었다. “다부동 전투가 얼마나 대단했는데,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유학산인데……” 나는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당연히 알아야 되는 양 구구절절 이야기 했다. “여기 다부동을 넘으면 바로 대구거든, 여기를 사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이곳을 수없이 뺏고 빼앗기길 반복했어.”

 다부동이 있는 가산면은 내가 어릴 적 내가 다닌 가산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소풍, 견학은 언제나 ‘다부동전적기념관’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이곳은 할머니 고향이기도 했다. 내가 6.25 전쟁 때를 물으면 할머니는 “대포가 펑, 펑, 펑”하며 두 손을 연신 들었다 올리셨다. 당시 어린 아가씨였다던 할머니, 아프신 어머니가 계셔 피난 갈 수 없었던 할머니는 산 넘어 울리는 대포가 근처에도 여기저기 떨어졌다고 하셨다. 자칫 아빠도 나도 세상에 없을 뻔 했다. 그곳의 고통은 전쟁 후에도 이어졌다. 마을에는 어릴 적 총을 가지고 놀다 눈을 잃거나, 수류탄을 가지고 놀다 팔을 잃어버린 아저씨들도 계셨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도착해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그 선생님의 분노가 생생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구한 나라와 지금의 우리들. 살아있는 것보다 팔 다리가 없어져 후방으로 가는 게 가장 좋은 것이었다는 그때의 낙동강 전투.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곳에서 목숨이 붙어있는 한 싸워야만 했다. 무기도 변변치 못한데다 주력을 다 하는 북한군. 매일같이 계속되는 전투. 더운 여름과 배고픔. 한 학도병의 수첩에서 발견된 편지에 우리는 눈물을 머금었다.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머니.’ 그러한 아픔과 고통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우리 대학생 모두는 결심했다.

 ▲ 우아, 이제 자유다! 해방이다.ㅎㅎㅎㅎㅎ 자신감으로 충만한 우리는 대한의 젊은 역군.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아자 아자 아자 홧팅!! ⓒkonas.net

 대장정 마치막 종착지 대구에 다다랐다. 모두가 함께 대구까지 왔다. 마지막 밤. 캠프파이어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있으니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도 빨리 흘러간 시간들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을 수많은 경험들과 추억이 있었다.

 말로 하기에도 너무도 많은 선물들. 그렇게 많은 격려와 대우를 또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가는 지역마다 재향군인회와 향군 여성회에서 뙤약볕이든 빗속이든 우리를 기다리시며, 시원한 물과 과일을 한 가득 나눠주셨다. 함께 걸어주시는 그분들이 있어 힘이 났고, 부모님처럼 챙겨주신 덕에 건강하게 올 수 있었던 이 길.

 부대마다의 환대는 우리에게 과분했다. 밤늦게까지 걷다가도 “Welcome 6.25 전적지 순례 국토대장정”하고 쓰인 현수막이 크게 걸린 부대가 보이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우리를 위해 특별히 온수도 틀어주셨던 그 샤워시설도 너무도 지저분하게 쓰고 나와 무척 죄송스럽다.

 반찬통 들고 다니시며 부족한 거 없느냐며 우리 세끼 식사를 맛있게 챙겨주신 아저씨.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일 바쁘신 와중에도 약 하나하나 챙겨주시던 팀장님. 우리들 배낭도 들어주신 고마운 분 실장님. 다리 아프신 데도 불구하고 우리들 제일 앞에서 이끌어주셨던 분,  더운 날에 우리보다 더 뛰어다니셨던 카메라 언니와 채정일대원님, 새벽까지 풀독으로 잠 못 드는 나를 간호해 주신 의료진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감사합니다.

 잘못한 것도 많은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신 단장님, 제 다리에 풀 독 난 걸 제일 안타까워 하셨던 단장님 감사합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여자의 몸으로 우리들과 항상 함께 하셔서 감탄을 자아내게 하신 부단장님. 쉬는 시간마다 우리들 발마시지를 도와주시고 학생들 하나하나 챙기시며 힘을 주셨던 부단장님 감사합니다. 작은 골목길까지도 막아주시고, 두 번씩이나 잃어버린 샤워도구를 찾아주시고, 늦은 밤까지 빨래도 챙겨주셨던 그리고 국토순례 중 가장 힘들었을 여러 스텝들, 모두 감사합니다. 물집 하나하나까지 보살펴주신 세밀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 아무런 사고 없이 우리 모두 완주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내가 배운 것들이 무척이나 많다. 북한군이 침범한 길을 따라 대구까지 왔다. 우리의 행군으로 그 길마다 잠든 구국충혼들의 위로가 되었기를.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나라위해 목숨 바친 한 인생, 참 잘한 일이구나’ 여기시도록 조국수호에 앞장서리라. 번져가는 불길 속에 장작들이 재가 되어 날아올랐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 자부심을 가지고 떠나온 의식의 대단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120여명이 함께 걸어온 358Km,우리들의 발자국마다 일제히 새 생명이 싹 틔었다. 길에 묻혔을 용사들의 거름으로 또 다시 피어나 이 길을 지킬 건강한 생명력이었다.

 내 몸은 바뀌어 있었다. 다들 철인이라고 했다. 하면 되는구나. 나 자신만을 믿는다면 여군생활도 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힘들더라고 하고 싶은 건 한다.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무엇을 위한 물리학자가 될 것인가. 행군하는 동안 솔선수범하고 도왔던 것만큼이나 돌아가서도 항상 전체를 생각하고 의미 있는 일에는 과감히 나를 던지리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들. 힘들었지만 끝가지 함께 와준 윤정이, 짐 한번 덜어주지 못해 미안한 슬기와 미리, 그 무거운 거 메고 얼마나 힘들었으려나. 물집나서 아픈 것 잘 참고 씩씩하게 걸어온 이래, 비오는 날 맨발에 슬리퍼 신고 강행했던 막내 회권이, 인대 늘어나 고생했던 진철이, 다리 아프다고 울상이었던 진형이, 남들 밥 챙겨주느라 자기는 제대로 못 챙겨 먹었던 훈이, 맏이로 항상 마음고생 많았던 민식오빠. 옆에 앉은 대원들의 손을 꼭 잡았다. 힘든 때도 많았지만 먼 길을 함께 와 준 나의 지기. 6.25 전적지 순례 국토대장정의 마지막 밤은 깊어오는데 우리는 누구 하나 잠들지 못했다.(konas)
 
 김보금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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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는 하나    수정

    웹상에서 산책하다 위의 글을 읽고보니. 좀은 가소로운데가 있네요? 1.정신이 해이하고 2.마음만의 전적지 순례지 완전히 놀자판? 3.다음에는 백두대간을 고성에서~대구 까지 간단한 건빵만 휴대하고 물과 식사는 현지행군에서 조달하고요(산모기에 물려도 보고 중간에 뱀도 잡아 구워먹어봐야 정말일까?? 합니다 6.25참전 유격대(소년병)이보는 관점에서는 전쟁의 철이 없는것같음</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

    2008-09-29 오후 4:08:21
    찬성0반대0
  • 동생    수정

    누나멋잇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8-30 오후 7:12:04
    찬성0반대0
  • 익산향군    수정

    힘든일 해내셨군요. 이러한 젊은이들이 많으면 만을 수록 대한민국의 미래가 환하게 밝아 질 같습니다것</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8-27 오전 10:21:50
    찬성0반대0
  • 익산향군    수정

    힘든일 해내셨군요. 이러한 젊은이들이 많으면 만을 수록 대한민국의 미래가 환하게 밝아 질 같습니다것</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8-27 오전 10:21:34
    찬성0반대0
  • 희안   

    6.25전적지 우리들노병들이 이나라민주주의수호를위해 젊음을다바첬던격전지 힘들고어려운대장정을다마친 여러분들의노고에감사하며 이나라의밝은장래가엿보여 마음든든하며 여러분앞날에영광이잇기를 기원합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08-15 오후 4:06:09
    찬성0반대0
12
    2023.1.31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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