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연호 미망인을 찾아>연꽃으로 피어난 사랑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포항시 기계면. 용화사로 가는 길은 6ㆍ25전쟁 당시 치열했던 기계 전투가 떠오르며 마지막 전선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용사들의 모습이 안개사이로 보이는 듯 했다. 이 때문인지 왠지 으스스한 산길을 지나 용화사에 다다랐다. 산중턱의 아담하고 수수해 보이는 용화사 앞에 서니 그 동안의 긴장감이 사라지며 평온하고 차분해 지는 건 왜였을까. 화려하지는 않지만 절제돼있고, 크고 웅장하진 않지만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느낌의 용화사를 둘러본 후 한연호 미망인을 만났다.
용화사의 스님인 한씨는 84살의 나이답지 않게 건강하고 곱디고우며 온화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다 지난일, 속세와 인연을 끊고 들어와 잊어버린 일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이 먼 길까지 왔나”라며 말하는 한씨를 보며 어쩌면 너무나 기억하기 힘든 고된 일들이 많았겠구나 생각됐다. 한씨는 몇 번이고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부분부분 기억을 더듬어 지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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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멍들게 한 3ㆍ8선
1926년 한씨는 단란한 가정에 막내딸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다. 20세가 되던 해 일본은 청년들을 징용하여 전쟁터로 내몰고 어린 처녀들도 정신대란 이름으로 끌고 가기 일쑤였다. 딸의 안위를 염려한 어머니는 한씨의 결혼을 서둘렀고 1945년, 4살 위인 남편과 결혼했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금강산은 말로 형용 할 수 없도록 아름다웠다”는 한씨는 “낯설고 부끄러워 대화도 없이 서먹서먹하게 다녀왔으나 내 일생에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씨의 달콤한 신혼생활은 잠시, 얼마 되지 않아 6ㆍ25가 발발했다. 친정집인 철원은 3ㆍ8선 위인지라 이후로 한번도 가지 못하게 됐다. 지금도 친정 생각만 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뭉클하다는 한씨는 3ㆍ8선은 자신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빼앗아가고 가슴을 멍들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6ㆍ25 참전한 남편, 기계전투에서 전사
남편은 육군사관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했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시골집에는 두 번 밖에 오지 못했다. 처음은 밤중에 들렸다가 큰댁에서 잔 후 새벽에 바로 떠났고 두 번째는 본가에 들렀으나 걱정으로 대청을 왕래하시는 시부모님의 사랑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밝히고 다음날 새벽, 자신의 몫까지 효도를 해달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한씨는 정다운 대화도, 위안의 말도 못하고 울음만 꾹꾹 누르고 보냈던 것이 너무도 가슴이 쓰라렸다. 이것이 마지막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남편은 졸업이 1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8기생들과 함께 졸업해 수도사단 제18연대에 배속됐다가 강원도 홍천 병력과 교체 하는 시기에 6ㆍ25가 발발했고 비학산전투에서 고지를 점령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다가 적의 총을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한씨는 남편이 산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슬픔이야 오죽했으랴. 그 뒤 틈틈이 책을 보며 공부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보훈처에서 일하며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들 영철씨가 월남 파병에 차출 되어 신체검사까지 받아왔다. 월남전이 얼마나 치열하고 정세가 험악한지 알고 있는 터였고, 제 아비를 전쟁에 읽고 자식을 또 전장으로 보내야 하는 어미의 심정은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는가. “얘야 몸조심해라. 제발 무사해야한다”고 몇 번을 거듭 당부하며 그 먼 길을 보냈다.
월남파병 큰 아들, 돌아왔으나...
1968년 큰 아들 월남에서 돌아왔다. 엄청난 포격 속에서 중대 병력이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시체 수습 중 실신해있는 것을 발견해 병원에 후송했다가 귀국 조치를 한 것이다. 한씨는 큰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감사했다.
그러나 말수도 적어지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큰 아들은, 근무기간이 남아 국내 전방지역으로 다시 배치 받았고, 열흘쯤 지난 어느 날 103야전병원 정신신경과에 수용돼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한걸음에 달려가 큰 아들을 만나봤지만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다. 큰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 조금씩 호조세를 보이던 중 제대 통지를 받아 군 병원에서 나오게 됐고 집으로 데려와 병간호를 하는데 갑자기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한씨는 사표를 제출하고 퇴직금과 집에 돈 될 만한 모든 것을 팔아 용하다는 병원과 약을 가리지 않고 써봤다. 그러나 현대 의술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산에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백운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할 때 남편이 현몽해 서울에 있으면 모자가 죽음을 면치 못하니 비학산으로 가라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산을 찾아 무턱대고 중앙선 열차를 타고 저녁에 내린 곳이 경주였고, 다시 아무 차나 집어타고 졸다가 종점에 도착하여 내린 곳이 기계면이었다.
다음날 가까운 산에 올라가려고 면사무소를 찾아 갔다. 당시에는 무장공비가 빈번히 출몰하던 때라 관공서에 신고가 필요했다. 기계면까지 내려와 산에 올라가려는 사연을 말했더니 당시 총무과장이 깜짝 놀라며 비학산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며 근처에 있으니 다음날 당장 안내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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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학산으로... 산화한 영령들 위해 기도
이렇게 처음 비학산에 오른 것이 1973년. 큰 아들 영철씨도 데리고 와 산에서 기도하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기도 중 남편이 산화한 곳임을 계시해 준 곳에 위령제를 올리고 그곳에 거처를 정했다. 1982년 선부의 위령비를 건립했고 1985년에 유해를 이장해 국립묘지에 안장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비학산을 떠나지 않고 스님이 되어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많은 전사자가 있던 곳이야. 그들 때문에 여길 떠나지 못하고 기도하게 됐다”며 “후세들이 와서 6ㆍ25전사지라며 머리 숙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산천이 다 타도 돌은 남겠지 싶어 비석을 세웠다”고 말했다.
전상1급인 큰 아들은 보훈병원에 입원해 계속 치료를 받고 작은 아들이 보살피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고 말하는 한씨의 표정에는 아직도 60이 넘은 아들에 대한 근심이 남아있는 듯 했다.
한씨는 작은 아들의 증손자 이야기를 하며 “생전에 좋은 것도 보고 나쁜 것도 보고.. 증손도 보는데, 먼저 간 이는 이것도 못보고..”라며 잠시 남편을 회상하는 듯 하더니 “그분은 효도 높고 나라에도 충신이었다”고 말하며 애써 그리움을 감추는 듯 했다. 이것이 60년 동안의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필자가 한씨의 기구한 삶에 안타까워, 나라에 대한 원망은 없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조금 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둘다 충신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죽고 병신이 됐다. 나는 그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죽은 사병들을 축원할 것이야. 그 부인, 어머니가 굳세게 살아 후세의 대한민국이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잘 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6ㆍ25에서 잃고 큰 아들마저 월남전에 참전시켜 중상이를 입고 돌아와 일평생을 뒷바라지한 한씨. 누구도 견뎌내기 힘든 일들을 겪고 억울함과 원망스러움을 사랑으로 바꿔 연꽃으로 피워낸 한씨의 배웅을 뒤로하고 비학산을 내려오는 길에 평온하게 잠든 산화영령들의 숨소리 같은 산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듯 했다.(konas)
김정훈(보훈신문 '나라사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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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8 오후 8: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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