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수기3] 내 나라에 대한 주인의식과 세계를 뒤흔들 자부심을 느끼며....
| 6.25 59주년을 맞이하여 재향군인회는 전국에서 선발된 125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포항까지 460km를 종단하는 제2회 '대학생 전적지 국토대장정'을 지난 6월 25일부터 11박 12일간의 대장정을 성공리에 끝마친 바 있다. 이에 코나스는 체험수기 공모에서 우수한 작품으로 선정된 6편을 엄선 시리즈로 게재합니다.
국토대장정을 통해 대학생들은 어느 곳에서도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6.25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전적지에서 또한 참전용사들의 경험담에서 피부로 느끼고 체험했다. 이 젊은 대학생의 고민과 갈증을 풀어 줄 해결책은 정녕 없는 것일까. 코나스는 잘못된 근.현대사 교육의 해결책을 바로 대학생들의 체험수기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독자들의 필독을 바라며......(konas 편집자 주) |
본인은 가을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어 이번 여름동안 무슨 뜻깊은 일을 해볼까 고민을 하던 중 우연히“대학생 6·25 적지답사 국토대장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지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6·25 전적지답사 국토대장정”에 참여하기 위하여 인터넷에서 카페에 가입하기 위한 질문에 대답해야할 때 당황했다.“ 올해로써 6·25 는 몇 주년이 되나요?”라는 간단하고도 쉬운질문에 선뜻 59주년이라고 답을 작성할 수가 없었다. 본인 스스로가 한국사와 근현대사에 제법 자신이있다고 생각해오던 터라 더욱 당황하였고 부끄러웠다. 올해는 물론 6·25가 일어 난지 59주년임을 이제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겨우 이 정도였음에 내 자신을 자책하며 내 나라 땅을 원 없이 걸었기 때문이다.
6월 25일 출정 첫날, 장충체육관으로 전국에서 올라온 똑같은 복색과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남녀 대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본인은 2소대 3분대의 분대장으로써 대원들의 출석과 필요물품의 확실한 준비여부의 파악이 첫 임무였다. 우리분대 대원들은 본인 포함 9명으로써 남학생 5명과 여학생 4명으로 구성되었다. 다들 어색한 유니폼을 입고선 혹여나 가방이 섞일까 빨래가 섞일까 하얀 수정액으로 자신의 이름과 분대를 적었다. 12일이 지나고나서 여기에 적은 그 이름들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으로 남을지는 이때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물건이 소중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당초 기대보다 더욱 엄숙하고도 한분위기에서“대학생 625 전적지답사 국토대장정”출정식을 장충체육관에서 마친 후 우리들은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국립현충원은 서울에서 20여년을 넘게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 처음에는 조금은 들뜨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엄숙한 분위기로 첫 참배를 드리고, 순국선열에 대한 첫 묵념을 하는 순간부터 태도를 다잡기로 마음먹었다. 나라를 위해 산화하신 많은 순국선열들의 넋을 위로하며,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까만 오석을 하나하나보며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 있는지 찾는 장난을 치던 대원들도, 끝도 없는 희생된 참전 용사들의 이름에 어느새 얼굴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많은 장병들은 물론, 경찰, 공무원, 이름 없는 나라의 전쟁영웅들, 해외참전용사들과 시신조차 찾지 못한 전쟁영웅들의 위패들을 처음으로 깊이 살펴보며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나와 내 형제, 친구들이 이렇게 웃으며 살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온몸으로 전율했다. 영현승천상 아래에 잠든 모든 영혼이 이 나라를 수호하여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 할 수 있음을 두 눈으로 새기고 오는 좋은 기회였다.
두 번째로 답사한곳은 수원에 위치한 프랑스군 참전비였다. 프랑스군이 참전하여 전사한 용사들의 이름과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져있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여부와 위치도 몰랐을 때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지구반대편의 조그마한 농촌국가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콧대높은 프랑스군들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희생되었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행군을 시작하여 수원화성을 지나고 수원 시내를 지나 공군부대에 첫 숙소로 도착하였다. 다들 어색한 초행길에 얼떨떨한 기분인 것 같았다. 분대원들은 첫날 하루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새 친밀해진 것 같았다. 공군부대에서 목욕탕도 사용하게 해주었고, 야식으로 치킨도 주자 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서로 아직 어색할 때였는데 같이 목욕탕에 너도나도 뛰어 들어가며 어느새 하하호호 오늘 일을 마치 몇 년 전의 일처럼 벌써 추억하고있었다. 남은 10일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다들 곤히 잠들었었다.
수원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오산에 UN군이 참전하여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것을 기념한 UN군 초전기념비가 있었다. 이곳 죽미령 전투에서 UN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 하였고 큰 패배를 당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북한에 대하여 방심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생각해보았다.‘ 햇볕정책’이라 하여 지속적인 경제지원정책을 하며, 문화교류로 통하여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정서로 우리를 안심하게 해놓고선 얼마 전에는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위협하고, 개성공단을 압박하며, 공단의 직원과 미국의 여기자를 납치하여 유구무언 하고있다. 그뿐인가, 본인은 의무경찰로써 2006년, 2007년, 2008년의 대한민국사회혼란의 태풍의 눈 이었던 국적불명의 시민단체들의 친북집회와 사회내부의 혼란야기를 눈으로 보고, 내 동기들이 피 흘려가며 집회현장에서 쓰러져 가는 것을 지켜봤다.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625전쟁은 끝난 전쟁이 아니라, 쉬고 있는 전쟁일 뿐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념비와 박물관 등을 보았지만 정말 너무나도 많은 국군뿐만이 아니라 미국군과 UN군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이 있어 지금 우리는 내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절대 안 될 것이다. 59년 전 일이지만 기념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자니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가슴이 아려왔다.
수원에서 평택까지 걷는 동안 폭염에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첫날과는 달리 익숙지 않은 잠자리와 첫 장거리 행군에 대원들은 지쳐갔다. 불과 하루 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여자대원들은 특히나 익숙지 않은 군대시설에 이미 많이 지쳐있었고, 푹푹 찌는 더위에 우리의 여자막내대원 유연지대원(20)은 현기증을 호소했고, 계속 밝은 모습만 보여주던 이효정대원(21)은 어느덧 말수가 부쩍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방서에서 쉬는 시간이 그렇게 꿀맛 같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긋지긋한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공사현장 뒤 그늘에서 다들 신발을 벗고 자갈밭 위에 너도나도 널브러져 누워버렸다. 그때 막내 이호성대원(20)이 양손에 한가득 들고 온 냉커피는 지친 우리를 조금이나마 일으켜 세워주었다. 저녁 늦게 되어서 겨우 우리는 방포여단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처음으로 체육관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다들 어제의 최고급 목욕탕시설과는 달리 벼락같은 찬물샤워를 하였다. 하지만 다들 찬물샤워가 오히려 더 시원하고 즐거운지 하루의 피로를 말끔하게 날려버렸다.
조금은 익숙해진 세 번째날 아침, 우리분대의 오여명대원(24)이 국군도수체조대표로 맨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우리는 어색하지만 다들 아침부터 웃으며 따라하자 금세 잠이 달아났다. 이틀 새에 뭉친 근육들과 평소와는 다른 아침에 다들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금세 또 다들 아침을 잘 먹는 것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침부터 고기반찬에 상추쌈이 나왔지만 다들 많이 든든하게 먹어두어야 하루 종일 힘이 들지 않는다며 여자대원들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웠다. 귀신 잡는 해병대출신 김동환대원(25)은 체육관에서 잠을 잘 때, 벽이 있는 쪽에서 자더니 아침부터 감기기운이 있다며 피곤한 기색이었다. 동환이 뿐만아니라 모든 대원들이 익숙지 않은 잠자리였는지 다들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행군을 시작하고 첫 휴식을 취할 때, 편의점 앞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자 언제 피곤했냐는 듯이 다들 얼굴에는 화색이 돌며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선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평택에서 출발한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콧노래로 불러오던 천안삼거리를 지나서 선문대학교까지 걸었다. 이날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더위가 지속되었다. 다들 열심히 분대구호도 외치며 한발한발 내딛으면서도 오늘 저녁에 있을 장기자랑 생각에 다들 벌써부터 기대 반 걱정 반에 설레어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누워있는 와중에서도 계속 장기자랑이야기뿐이었다. 어떤 것이 재미있어서 대원들의 피로를 잠시나마 잊게 해줄 수 있을지 다들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로 행군 중에 회의를 함에 있어서 누구의 아이디어가 더 재미있다고 서로 추켜세우며 웃는 모습이, 어느새 원래 알고 지내던 동네친구처럼 다들 오래된 친구들 같았다. 점심식사를 초등학교에서 했는데 어찌나 더웠던지 다들 풀썩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본인도 발도 아프고 너무나 더워서 지친나머지 분대장의 역할도 잊고선 대원들의 점심도 챙겨오기 전에 땅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점심을 먹고선 다들 다시 걸어야한다는 생각에 힘들어하다가도 분대기를 높이 들고 분대구호를 한번 힘차게 부르고선 우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선문대의 높디높은 정문의 언덕을 넘고 나서 잔디밭에서 실컷 먹은 수박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다른 분대원들은 음악에 맞추어서 춤을 추거나, 다른 대원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장기자랑들을 많이 준비했었다. 우리 분대원들 또한 다른 대원들을 많이 웃겨서 피로를 한 번에 잊게 해주고자 이런저런 고민 끝에 개그콩트를 준비하였고,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있었던 여러 소재들을 재밌게 풀어서 대원들에게 선보였다. 본인과 오여명대원(24)이 주인공을 맡고, 김동환대원(25)과 다른 분대원들이 보조역을 맡았다. 우리분대는 이 장기자랑을 통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고, 장기자랑에서는 2등을 하게 되었다. 장기자랑을 통해 우리 분대원들끼리도 서로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고, 친해지는 큰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즐겁기 만한 레크레이션이 끝나고 우리는 우리의 숙소인 선문대학교 복도에서 하나둘 침상을 깔고 잠을 청하였다. 이날 우리는 넓은 복도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쇼파도 많았고, 책상을 비롯한 많은 가구들이 있었는데 모든 대원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알아서 적극적으로 물건들을 구석으로 치우고 밀고 청소하는 모습에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불과 만난 지 3일이 된 우리였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남이 불편할까봐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어느덧 우리에게 끈끈한 전우애가 생겼구나 라고 느꼈다.
이제 아침에 부지런하게 일어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일도 아니었다. 밖을 보니 하늘에는 비가 올 듯 말듯 한 날씨였다. 가방을 오전동안 추진한다는 소식은 대원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오전 내내 또 걷고 나서는 점심을 비빔밥으로 먹어치운 후 우리는 다시 가방을 메었다. 다리 밑에서 먹는 지친우리들이 우걱우걱 먹는 비빔밥이 어찌나 초라하던지 지금생각해도 참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다. 이날 우리는 제법 멀고 힘든길을 지속적으로 걸었다. 조치원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 험했다. 막내 유연지대원(20)은 쉬는 시간 내내 누워 있다가 다시 걷기 위하여 일어나는 순간 기절하였다. 놀란 우리분대원들은 모두 유연지대원(20)을 엎고선 급하게 의료스텝에게로 신발도 채 신지 않은 채 달려갔다. 다음 쉬는 시간때마다 구급차에 누워있는 연지를 바라보며 자기들은 쉬지도 않고 연지가 괜찮은지 묻는 우리분대원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자기들도 온통 발에 물집이 한 가득이고, 다리가 아파서 후들거리면서 혹여나 막내 연지가 많이 아픈가 걱정하고, 의료차량에서 연지를 보고선 절룩거리며 돌아오면서 “연지 괜찮아, 자고 있어.” 라며 함박웃음을 짓는 장인호대원(25)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잊을 수가 없다. 이날따라 워낙 힘이 들어서 남자대원들은 여자대원들의 가방을 들어주기도 하고, 자신들의 힘든 상황은 잊고선 우스갯소리로 피곤함을 잊게 하려는 모습은 정말 자신들의 친동생들을 챙기는 모습과 같았다. 이제 3분의1정도를 왔지만 우리들은 3배는 더 처음보다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지속적으로 찌는 더위에 걷다보니 다들 지쳐만 갔다. 우리가 걸어가는 지역마다 폭염이 지속되었다. 우리는 행군 다섯째날 점심을 공사 중인 한 건물에서 먹었다. 순식간에 식사를 마치고선 시원한 공사장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몇 십 분간의 짧은 휴식이었지만 다들 깊이 잠들었다. 시원한 바닥에 다들 누워서 잠시나마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후에는 정말 찌는듯한 더위의 연속이었다. 그 전날 비가 왔었는지 바닥에서는 열기와 습기가 후끈후끈 올라오고 다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우리는 결국 계룡대에 입성하였다. 계룡대에 들어가기 전 끝없어 보이는 고갯길은 정말 우리의 체력의 한계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지친 몸과 마음에 갑자기 들려오는 의장대의 환영과 군악대의 소리가 우리의 등을 밀어주었다.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심장에 우리가 드디어 들어온 것이다. 기라성 같은 장군님들의 환영사를 받으며 우리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있구나 라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다. 솔직히 많이 힘들고 지쳤지만 내가 걷는 것이 제법 할 만한 일이라고 자부심을 갖게 되자 한걸음 한걸음이 의미가 있었다. 행군도중 정일훈 행군단장님께서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나라 땅을 원없이 걸으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구나!” 이날 계룡대 병원에서 직접 원장선생님께서 우리대원들의 발을 진료를 일일이 다 해주셨다. 한 명 한 명 다 진료하시기는 너무나도 많은 환자였기 때문에 다른 군의관분들에게 맡길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모든 대원들의 물집과 상처를 일일이 새벽까지 다 손수 치료해주시고선 우리에게 힘내라고 격려해주시는 모습에 정말 힘이 났다. 다음날 대원들의 물집도 원장님의 솜씨와 정성에 힘입어 정말로 많이 회복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오전동안 계룡대에서 견학한 후 우리는 대전현충원으로 이동하였다. 대전현충원에서 다시 참배를 하고, 현충원에 잠드신 호국영령들의 묘비 앞을 정리하며 잠시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분대의 여자막내부대원 유연지대원(20)의 할아버지께서 그곳에 계셔서 우리 분대원들은 따로 그 묘비 앞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구름이 껴있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서 참 걷기에 좋은 날씨라 대원들은 지칠 줄 모르고 걸었다. 이날 숙소는 남학생들은 산속에 있는 예비군식당이었다. 다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까 사둔 과자들과 음식으로 회식 아닌 회식을 하며 지난이야기를 하며 잠을 청했다. 일주일이 다되어가자 벌써 절반이나 왔다며 아쉬워하는 대원들이 많았다.
여덟 번째날 아침으로는 군대용 햄버거가 나왔다. 여자대원들과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막내 이호성대원(20)이 먹는 방식에 익숙해하지 않다며 우물쭈물 거리자 김동환대원(25)이 맛있게 만들어먹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국도를 통하여 행군을 하다 보니 차에 치여 죽은 야생동물들, 로드킬이 너무나도 많았다. 우리는 죽은 동물들을 보며 안쓰러워하며 행군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지속적인 더위속에서 지속적으로 대원들을 챙겨가며 걷다보니 어느새 나를 잊어가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원들 모두가 스스로를 잊고선 다른 분대원들의 걱정을 더 많이 했다. 추풍령을 넘으며 혹여나 길을 걷다가 넘어질까, 발을 헛디딜까, 앞에 있는 장애물에 발가락이 다치지는 않을까, 이미 쉬어버린 목소리로 큰소리로 앞에 장애물이 있다며 뒤에 대원들에게 알려주는 모습은 정말 전우애라는 것이 생긴 것 같았다.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서 경상도의 다부동에 이르러서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도착하였다. 1기선배님의 부모님께서 시원한물을 주셔서 다들 어찌나 기뻐하며 시원한물을 받아들고 아이처럼 좋아하던지 그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적기념관에서 시청각교육을 받던 중 어느 학도병의 수첩에서 발견된 편지를 성우가 읽는 부분에서 모두가 다 눈물을 머금었다. 본인도 의무경찰생활을 함에 있어 극렬한 집회현장에서,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캠퍼스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함께 기계를 만지던 노동자였던 친구들이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날아오는 돌과 쇠파이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두들겨 맞을 때 나와 내 동료들이 느끼던 감정보다 더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적이 과연 누구인지, 전쟁을 왜 해야 하는지, 왜 내 전우들이 죽어나가는지, 집에서 이가시리도록 냉수가 마시고 싶고 어머니 품이 그립다는 그 학도병의 편지는 2기 대원들 모두의 가슴에 전율을 가져왔었다. 전쟁의 참혹함을 모르고선 전쟁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렇게 참혹했다던 다부동전투지역은 지금의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대구를 지나 영천에 도착하자 영천 재향군인회분들이 많이 와주셔서 우리를 환영해주셨다. 다들 막바지라 힘들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으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격려에 사기가 올랐다. 항상 날이 덥더라도 미리 나와 주신 재향군인회 분들에게 뒤늦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어느덧 마지막 날 영천호국원에서 포항까지 가는 길이 다가왔다. 표지판에 포항이 나오는 순간 꿈을 꾸고있는 것만 같았다. 본인에게 있어서는 다부동전적기념관만큼 커다란 자극이 된 곳은 바로 포항의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이었다. 본인의 친동생은 이제 중학교3학년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남동생의 나이인 많은 학생들이 나라가 위험에 빠지자 책과 펜을 두고 자신만한 크고 무거운 총을 메고 전쟁터로 나아갔다. 그 누가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나라가 없으면 지금 공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일본에서 유학중인 학생들도 귀국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고도로 훈련된 북한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내 친동생 같은 학생들이 전투에 참가하여 산화된 것이다. 그렇게 지켜진 곳이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다. 소위 6.25 전쟁세대는 이제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었고, 본인의 할아버지도 6.25이야기를 옛 추억처럼 이야기하신다. 우리들은 전쟁을 잊고 있다. ‘전쟁’이라하면 TV에 나오는 중동전쟁만 생각하고 있다. 옳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적을 가까이 두고 있는 나라에 살면서 전쟁을 잊는 것은 옳지 않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긴다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세대는 적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잘 모르고 있는 것만 같다. 6.25 전쟁에 관하여 다들 너무 모르고 있다. 다들 잊어만 가고 있는 것 같다.
처음 국립현충원에서부터 대전, 대구를 지나고 포항까지 오면서 가장 참혹했던 낙동강 방어선을 쭉 둘러보며 느낀 것은 단 하나다. 내 나라의 과거를 알고, 내 나라의 주인공은 나자신이라는 주인의식을 갖고, 내 나라를 누구보다 내가 사랑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행군을 알았으니 이제 앞으로는 승리의 행군만을 해야 할 것이다.
2008년 6월 25일부터 7월6일까지 서울에서 포항까지 461km를 내 두 발로 걸었다. 발바닥이 부르트고, 물집이 터져서, 피고름이 고이고, 발바닥은 불이난듯 뜨거워서 한걸음, 한걸음이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무거운 배낭을 던지고 주저 앉고 싶었고, 집으로 달려가서 내 침대에 눕고 싶었으며, 이가 시릴만큼 냉수를 벌컥거리며 마시고 싶었다.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는 12일 동안 하루에 9시간씩 걸었다. 타는 듯이 작열하는 태양아래 우박과 같은 장마소나기에도 불구하고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현기증에 쓰러지는 대원의 짐을 들고 시원한 바람조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탓하며 이글거리는 열풍 속에서 10kg 가까이 되는 배낭을 메고 걸었다. 추풍령고개에선 혹시 넘어질까, 서로를 부축하며 넘었다. 힘이 들때 생각나는 것은 지난날의 기억과 추억, 무엇이든지 함께 하고자 했던 작지만 뜨거운 열정, 그리고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2기 대원들 모두가 함께 걷는 길이었기에. 힘들지만 해낼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해내지 못 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몸 성한 사람이 없었지만, 함께 웃으며, 소리 질러 노래하며 목표지점을 향했다. 콘크리트 식당바닥에서도 자고, 농구코트에서도 자고, 대학교복도에서도 자며, 포항앞바다 모래사장에서도 잠을 청했다.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나약한 내 자신만을 안타까워했다. 이번 계기로 흐트러진 내 마음가짐을 다잡았으며,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죽을 기세로 덤비면 못이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고로 젊은이란 눈에는 정기를, 가슴에는 의기를, 삶에는 윤기를, 품고 세상을 뒤흔들 자신감을 가져야한다. 12일간의 해외여행보다 내 두발로 걸은 국토대장정이 내게는 더욱 소중하다. 국토대장정을 통하여 내 스스로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명의 실패자 없이 분대장인 나와 함께 걸은 2소대 3분대원들.
정통 부산파 사투리 사나이 동갑내기 해병대 남자 동환이, 뒷꿈치가 다 까져도 아픈 내색 한 번 안한 아빠 매력점 인호, 끊임없이 먹어대는 비보이 댄서 밝히는 막내 호성이, 모두를 유쾌하게 만들어준, 만능 보급오성장군 여명이, 끝까지 부채와 함께한 말투 느린 할머니 선생님 고은이, 합기도유단자인 든든한 맏언니 여자분대장 윤정이, 기절해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던 막내울보 칠곡딸래미 연지, 발바닥이 튼튼하고 술버릇 있고 아침이면 얼굴 붓는 효정이. 너희들과 함께여서 영광이었고, 너무나도 행복했다. 너희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비록 모두가 다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120여명의 국토대장정 대원들과 스텝들 모두 우연을 계기로 만나게 되어, 인연을 맺어 마음이 통하여 기뻤습니다. 이리 저리 뛰어다니느라 고생 많았던 촬영스텝들, 더위 속에 쉬는 시간에도 신발한번 못 벗었던 행군스텝들, 밤에도 쉬지 않고 대원들의 발을 책임져주시던 의료스텝들, 숙소와 식사를 챙겨주신 팀장님과 행군의 안전걱정을 가장 많이 하신 실장님, 그리고 씩씩하게 선두로 나아가시던 부단장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대원들을 생각해주시던 단장님까지 모두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원하는바 이루도록 하여 언젠간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konas)
안상현(한국외국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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