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수기6] 마음 속 태극기를 그리며
모든 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왼쪽 가슴에는 자신의 소대와 분대가 적힌 명찰을 달고 오른쪽가슴에는 6·25 전적지 답사의 배지를 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배낭에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소중히 달고 출정식을 위해 당당히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명찰과 배지 그리고 태극기를 단 그 순간부터는 배낭의 무게보다 마음의 무게가 더 크게 늘어난 기분이었다.
체육관 안으로 들어선 순간,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우리를 향해 많은 박수세례와 카메라 셔터들이 쏟아졌고 예상치 못한 큰 신고식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장님의 출정보고와 학생 대표의 출정결의문 낭독은 곧 평정심을 찾게 해주었다.
출정식이 끝나고 우리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는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향했다. 현충원의 발을 내딛고 참배를 드리는 순간만큼은 남녀대원 125명 모두가 엄숙해졌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50년 6·25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위패 봉안관 안으로 들어서자 수없이 많은 이름이 빽빽이 벽면을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싸우다 이름 없이 죽어 간 수많은 무명의 병사를 위해서 한 번 더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또 연로한 할아버지가 바닥에 자리를 잡으시고 술을 따르시며 낡은 사진을 꺼내 보고 계시던 모습이 아직도 나는 잊혀 지지 않는다.
6·25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을 기리기 위한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를 마지막으로 모든 답사를 마친 후 드디어 우리는 첫 행군을 시작하였다.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은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발걸음을 뗀지 얼마 안 되어서 벌써부터 숨이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가방은 버겁기만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선다면 11박 12일의 행군은 하루만에 물거품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체력보다는 정신력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수원으로 향했다.
어느 새 우리는 첫 번째 목적지였던 군부대에 도착했다. 밥을 먹고 몸을 씻고 얼른 잠을 청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이 들기를 기다렸지만 잠자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다 처음이기 때문에 어색하기만 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녘 가까이 되어서 잠들 수 있었다.
[6월 26일] 우리는 625전쟁 때의 유엔군의 첫 전투를 기려 세운 유엔군 초전 기념비로 향했다. 유엔군의 첫 전투 때 공을 세운 특수 임무부대인 스미스 부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국토대장정에서 3소대 3분대는 인원이 다른 분대에 비해서 적어서 자칭, 타칭으로 스미스 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제 간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 그리고 오늘 온 유엔군 초전 기념비를 보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 타국에서 싸워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감사했다. 오늘날 내가 누리는 평화가 온 세계인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래에 예비교사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6p25를 가슴에 기리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바뀐 잠자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는 못했지만 이틀째라서 긴장이 누그러져서 첫 날보다는 기분이 맑고 상쾌하였다. 여전히 배낭은 무거웠지만 어깨에 오는 착용감이 익숙해지고 있었고 쉬는 시간마다 그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앉아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열기를 식히는 것도 이제는 부끄럽지 않았다.
앉아서 쉬고 있을 쯤 갑자기 3소대 1분대 유선미를 찾는 스텝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하면서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선미 언니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다 들 할 말을 잃고 넋을 놓고 서있었다. 어떻게 위로를 해주어야 할 지 생각도 못한 채 맨발로 뛰어나가 울먹거리는 언니의 손을 잡아주고는 작별인사를 고했다. 끝까지 같이 걷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12명이었던 우리 분대는 11명이 되었다. 그러나 행군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한 명이 줄어서 인지 우리 분대는 더 애틋해졌다. 걸으면서 우리는 조금씩 서로가 누군가에 대해서 알게 되기 시작하였다. 이 행군이 아니었다면 서로전국에서 흩어져서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갔을 우리가 6·25를 통해 새로운 만남의 인연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행군이 시작되니까 같은 분대의 하니 언니가 지쳐 가기 시작했다. 힘들어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니까 나 역시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를 꽉 깨물고 언니의 팔을 잡아서 이끌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걷고 또 걷자 안 보일 것 같던 우리의 도착지가 보였다. 드디어 살았다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6월 27일] 6시에 기상해서 체조를 하고 밥을 먹고 체육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3일차 행군은 시작되었다. 어제는 힘들어서 고개를 들 힘도 없어 제대로 못보고 지나쳤던 산과 들을 보게 되었다. 소들도 어제 봤던 우리를 기억하는 것인지 우리를 보고 신이 났는지 더 ‘음메음메~’정답게 울어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더 신나게 웃으며 걸을 수 있었다.
어제 힘들어했던 하니 언니와 분대장인 민우 오빠가 서로 가방을 바꾸어 메었다. 배낭이 가벼워 진 덕분에 하니 언니는 어제보다는 컨디션이 좋은 듯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같은 분대원인 청기오빠가 힘들어 보였다. 행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발인데 신발을 잘못 선택하였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하지만 여동생들 앞이라서 그런지 청기 오빠는 끝까지 꿋꿋이 참는 것 같아 보였다. 드디어 쉬는 시간이 왔고 모두들 물 한 모금에 목을 축일 때 청기오빠는 캠핑카에서 치료를 받았다. 오늘의 여정이 일찍 끝이 나서 참으로 오빠에게는 다행인 듯하였다.
선문대에 도착해서 건물의 현관에 배낭을 내리고 쉬고 있는데 분대장 오빠가 나에게 브이라인이 생겼다고 하였다. 행군 3일 만에 얼굴 살이 빠졌나보다. 갑자기 더 걷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지만 마음만이지 몸은 푹 퍼지고 있었다. 간식으로 수박, 바나나, 참외와 같은 신선한 과일과 다양한 종류의 음료수와 커피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준비해주어서 우리의 고달팠던 행군을 위로해주었다. 저녁 식사의 간식으로 떡까지 나와서 서로의 입에 먹여줬던 기억이 난다.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신나게 먹고 나서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우리 분대는 마라톤 하는 것을 방송에서 카메라로 찍혀 보여주는 장면을 연출했었다. 우리 나름대로는 열심히 준비했는데 역시 연습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순위권 안에 들지 못해서 아쉬웠다. 하지만 장기자랑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우리 분대원들의 끼와 재능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장기자랑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조금 주어졌었는데 그 때 우리 분대는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진실 게임과 마니또 게임을 하였다. 이러한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 더 서로에게 가까워 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특히, 마니또 게임은 행군이 끝나기 전날 밤까지 했었는데 서로가 서로의 1004가 되어서 행군을 하는데 더 사기를 북돋아주고 친밀감을 강하게 해주어서 좋았다.
그렇게 선문대에서의 밤은 깊어가고 이 날 내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냉수로 샤워를 했던 기억이다. 드디어 우리 분대가 씻을 차례가 왔다. 정말 신나서 물을 확 틀었는데 정말‘꺅’하는 비명소리가 절로 나왔다. 진짜 온 몸이 얼어버리는 줄 알았다. 샤워시간은 단 5분이었고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고 비누칠도 제대로 못한 채 머리만 감고 물을 한번 축이고나 올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분대 오빠들은 안 씻었다고 나를 행군 마지막 날까지 놀렸다.
[6월 28일] 선문대 앞 잔디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아침 식사를 시작하였다. 이 날 밥이 약간고들 밥이었는데 어찌나 집에서 먹던 밥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 같이 먹으니 어느 새빈 식판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서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맑지 못하다. 비가 오면 배낭을 트럭으로 실어준다는 이야기를 미리 듣고 왔기 때문에 드디어 비가 오는구나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올 수도 있으므로 배낭을 미리 회수해갔다. 배낭 없는 자유의 몸이 되고 나니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던지 선문대 교문을 나갈 때는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몸이 가벼우니 당연히 구호 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간다.”,“ 어디로”,“조치원으로”,“ 아싸 아싸 아싸 31”“아싸 아싸 아싸 31”
기쁨도 잠시였다. 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비 구름 떼는 우리가 있는 지역을 피해서 서울로 바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점심으로 비빔밥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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