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용사 만남의 장'을 돌아보고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베트남파병을 앞둔 병사들이 모여 현지 지형과 상황에 대비하여 훈련을 받던 곳, 그곳은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다. 2008년 8월, 이곳에 베트남참전용사 만남의 장이 문을 열었다. 가을단풍이 최고조에 달한 지난달 10월 30일, 말만 듣고 가보지 못했던 이곳 참전용사의 집을 찾았다.
오음리 일대 14만에 180억원의 예산을 들여 만든 이곳은 1965~1972년 베트남전에 참전한 장병들이 6차에 걸쳐 훈련장으로 쓰던 곳이다. 이곳에는 전쟁당시 사용했던 한국군과 베트남군의 무기, 깃발, 국군의 활약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요즘은 베트남에 가면 꼭 한번 찾아가 본다는 꾸찌터널이 축소되어 만들어져 있다. 괜찮은 위치에 널찍한 부지, 다양한 전시물에도 불구하고 접근성의 제한으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설명에 마음이 무거웠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베트남참전은 참전인원 325,517명, 전사 5,099명, 부상 10,968명의 수치가 말해주듯 민족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파병의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각종전투에서 한국군의 전략전술과 용맹성이 두드러지게 빛났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받은 무공훈장은 태극무공만 12개였다. 그밖에 을지 160개, 충무 891개, 화랑 7639개, 인헌 1만3137개 등 2만 1000여 개에 이른다.
이 밖에도 우리 군은 소중한 실전경험을 쌓았다. 미군과 함께 첨단무기를 다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국군 현대화를 앞당겼고, 250만명의 예비군을 무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사분야 뿐만 아니라 경제부문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미국은 월남전 개입으로 군사비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한국경제에 베트남 특수로 이어졌다. 외환 보유고가 늘고 급속한 공업화가 이뤄졌다. 한국은 파병군인의 송금과 미군 물자조달로 연간 2억 달러의 특수를 확보했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10억 2200만 달러에 달하는 특수를 누렸다.
이것은 같은 기간 일본으로부터 외자 도입액 10억 8900만 달러에 버금가는 돈이었다. 수출도 빠르게 성장해 1964년 1억 2000만 달러였던 것이 1972년에는 16억 2,400만 달러로 늘어났다.
결국 우리나라의 근대화, 공업화, 산업화, 그리고 오늘날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G20 회원국은 사실상 월남파병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이러한 빛나는 파병 성과 뒤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 5099명의 장병이 전사했다.
아직도 12만 7000여명의 고엽제 환자들이 참전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무쪼록 목숨 바쳐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참전용사들이 그 위훈에 걸맞는 예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 위기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전쟁터로 뛰어들려 할 것 아닌가?
그 후 세월이 흘렀고, 상황은 변했다.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12월 공식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2009년 10월말 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하여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로 발전해 나가는데 합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8000여명의 베트남여성들이 한국남성과 결혼하여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대부분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잘 살아가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문화적 차이, 언어적 차이, 차별과 폭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도 적지 않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이들을 넓은 가슴으로 보듬고 함께 잘사는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가야 할 것이다.(konas)
김덕봉 (자유기고가, 전 국방일보 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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