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다 - 어느 실향민의 회상과 소망
이 글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한에서 살던, 이제는 초로의 노신사가 된 한 실향민의 육필 수기형 글임. 어린 시절 북쪽에서 학창시절 보고 듣고 느끼고, 이후 남한으로 피란해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을 겪으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정을 과거와 대비하면서 장편으로 작성해서 코나스 편집실로 보내온 글임.
이 글을 보내온 김영수(가명)씨는 우편으로 동봉한 편지에서 본인이 실명을 언급하지 않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우리사회가 북한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맹목적으로 맹신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도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글을 보내주신 김영수님께 감사드리며 '코나스'는 김영수님의 글을 5회에 걸쳐 시리즈로 게재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하며 김영수님의 건승하심을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
* 자아비판(경험1)
"3학년 1반 김영수(가명), 나와서 자아비판하세요."
나는 연단 쪽으로 나갔다. "3학년 1반 김영수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우리 교실 밖에 있는 화단을 매일 깨끗하게 청소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숙제가 많아 수요일 하루는 못하였습니다. 반성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4월로 어느 토요일, 내가 북한의 인민학교에 다닐 때, 토요일마다 열리는 3,4,5학년 전체 학생 간부회의에서 나를 '자아비판'한 내용이다.
나는 6.25동란이 일어난 1950년에 북한의 한 시골에서 인민학교 3학년(당시 북한은 우리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인민학교가 5년제였다)에 다니던 10살짜리 꼬마였다.
내가 3학년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3월 하순경이던가, 나는 학급간부 선거에서 간부로 선출되었는데, 학급간부는 토요일마다 열리는 전교 학급간부회의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보통 자아비판이라면 먼저 과제가 주어지고, 그것을 수행하지 못하였거나 잘못 수행했을 때 하는 것으로 알고들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과제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한 명씩 모두 연단 앞에 나와서 자기가 속한 반 또는 학교를 위해서 어떤 유익한 일을 하기로 결심을 했었는데, 하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 라는 전제 하에 자기를 비판해야 했다.
나와 아이들은 회의가 거듭될수록 이야기 밑천이 달려 나중에는 거의 꾸며서 얘기하자니 여간 힘들고 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였지만 이것은 북한 전역에서 벌어지는 행사였다.
북한 공산정권은 어린 학생들에게 무엇을 심어 주고 싶었을까?
* 군대식 하교 길(경험 2)
학교수업이 끝나고 갈아갈 때는 같은 방향에 집이 있는 같은 반 아이들끼리 대열을 지어 발걸음을 맞추고 교가 등을 크게 부르면서 우측통행을 했다. 팔을 앞뒤로 많이 흔들어 군인들이 행군하듯이 걷다가 한명 한명씩 집으로 들어가고 2,3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했다.
* 야간회의(경험 3)
학교에서는 같은 반의 같은 리에 사는 아이들끼리 일주일에 한 번, 밤 7기를 정하여 놓고 야간회의를 하도록 했다. 회의 내용은 그때마다 좀 달랐지만, 반이나 학교 또는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기 위한 계획과 실천방안을 토론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담임선생님께 제출하도록 했다.
회의 시간은 1~2시간 정도였고, 토의가 끝난 후, 달도 별도 없는 비마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면, 그것도 옛날에 호랑이가 출몰했었다는 산길을 뛰어 내려와, 무서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거기서 또 2~3km 떨어진 곳에 있는 여학생을 바래다 주고는 하였다.
그 때를 회상하면 향수로도 남아 있지만 북한정권은 어린이들을 어떤 인간상으로 만들고 싶어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 어른들의 회의(경험 4)
이것은 간접경험인데 어른들은 직장에서 퇴근 후 저녁 8시부턴가 반 단위 모임이 거의 매일 있어서 당에서 내려온 듯한 무슨 수칙 같은 것을 받아 와서 집에서 밤늦게까지 암기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다. 잘 암기하지 못하면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고 했다. 회의 시간은 1.5!2시간 정도인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 전 해인 1949년까지는 주로 남자 어른들이 회의에 참석했던 것 같고, 1950년(6.25전쟁이 터진해)에 들어서는 여자 어른들도 참석하는 날들이 많았던 것 같다. 1945년 해방 후 시일이 점점 흐르면서 북한에서는 거주, 이전도 허락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 여행까지도 허락을 받아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 전쟁준비(경험 5)
나의 짐작이긴 하지만 북한공산정권은 6.25남침을 위하여 준비해 왔던 것을 195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실천했던 것 같다. 그 때, 우리 집 부근에 '국영사업소'(북한공산정권은 실질적인 개인기업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국영기업을 뜻하는 이름이다.)가 있었다.
이곳은 평소엔 일상생활 용품을 주로 생산하는 것 같았는데, 1950년에 들어와서는 무엇을 생산하는지는 모르지만, 일주일 단위로 우수한 생산성과를 올린 노동자들의 이름을 사업소 바깥 벽에 그림과 함께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지난 주에 가장 생산성이 우수했던 노동자는 이름과 비행기 그림을, 두 번째로 생산성이 높은 사람을 이름과 기관차(기차)로, 세 번째는 이름과 자동차, 네 번째는 자전거, 다섯 번째는 우마차 이런 식이었다.
그 때 나와 동네 아이들은 그것이 매주 바뀌는 것을 보면서 "이번주엔 누구누구가 1등 했네" "야! 잘한다"고 하면서 신기해하던 기억이 새롭다. 이것은 나쁜 놈들(?)인 한·미연합군이 우리가 살던 곳으로 쳐들어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
*전쟁시작(경험 6)
그러던 중 6월말쯤 해서 나쁜 놈들(남한)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전쟁이 난 것 같지 않았다. 이후에 커가면서 생각해 보니, 준비가 없던 남한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3.8선 아래쪽으로 치고 내려가니, 3.8선 위쪽에 있던 우리 동네에서는 총소리, 비행기소리 등 어떤 전쟁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는 아군(북한군)이 자꾸 이겨서 내려간다고 하니 좋다! 잘한다! 야,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그후 몇 달은 승승장구 계속 이겨서 쳐 내려간다는 좋은(?)얘기만 들렸다. 그리고 동네에 표지만을 세워 오늘은 어느 곳이 해방되었다. 라고 자랑스레 선전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몇 달 뒤부터 전쟁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적군(한미연합군)의 공습이 우리 동네에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맥아더 장군의 9.28인천상륙작전 이후였던 것 같다.
공습은 점점 심해져서 깊은 밤중 새벽 2,3시경에도 거의 매일 한두 차례씩 계속 되었다. 한밤중에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우리 가족은 집뒤 텃밭에 파놓은 방공호로 피난을 갔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이 임시로 급히 파놓은 방공호가 좁고 허술해서 우리 식구들이 겨우 들어갈 정도였고, 그곳으로 피난 가는 것이 집에 그냥 남아 있는 것보다 덜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른들이나 형(어른들은 한밤중에 회의에 나가시고 안 계실 때가 많았음)이 깊이 잠든 아이들을 깨우는데, 특히 잠들면 업어가도 모를 나인인 나는, 죽어도 괜찮으니 그냥 두고 가시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공습이 한동안 계속되더니 이번엔 적군(한미연합군)이 우리동네까지 쳐들어 왔다. 나이가 40대로 젊으셨던 아버지는 미리 피신을 하셨고(그 후 아버지 소식은 아직 모른다)어머니와 우리 남매들은 중공군 참전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피란민들의 대열에 끼어 부산으로 월남하게 되었다.
피난길의 고통도 어려웠지만, 피난생활도 너나 없이 힘들었다. 겨우 11살이 되었던 나도 신문팔이, 떡행상, 공장취업 등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집 형편은 물론, 그 때 피난민들 사정은 거의 비슷했다.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들어 해맸던 기억들을 70대 이후의 사람들은 거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진한 향수로도 남아 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행복하다는 생각뿐이다.
*회상 (경험 7)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게 된 참담한 민족비극이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하고 커가면서 생각해 보니, 2차대전 말기에 ‘소련’이 참전을 선언하고 위도 38도 선 남쪽은 미군이, 38도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간수하지 못하고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의 문을 열지 않아 세계화, 개방화 바람을 제 때에 타지 못했던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볼 수 있는 안목과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당위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북에는 소련, 중공세를 업은 김일성 공산 집단이, 남한은 미국세력을 업은 이승만정권이 들어섰고, 해방된 지 5년도 채 안되어 북의 김일성 정권이 남한을 공산화 하고 싶어 ‘소련’ ‘중공’을 등에 업고 침략전쟁을 시작한 것이 우리민족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konas)
* 민족의 장래가 걸린 문제이고, 또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야 하므로 실명을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 바랍니다* (konas)
<다음으로 계속>
어느 실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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