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여성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136명 독립유공자 포상
국가보훈처는 오는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김희식 선생 등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96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지익표 선생 한 분(95세)이며, 여성이 28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본인과 유족에게 수여된다.
그 동안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045명, 건국포장 1,317명, 대통령표창 3,463명 등 총 15,825명(여성 472명)에 이른다.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김희식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무학(無學)의 평범한 농민으로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 원곡면사무소 앞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의 중형을 받고 큰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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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일 선생은 1,000여 명의 면민과 함께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인근 양성면사무소와 양성면 경관주재소 등을 공격․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무단통치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일제의 폭압에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다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중형을 받은 사례다. 독립만세운동 당시 전국적으로도 격렬한 항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경기도 안성시에서 포상을 신청한 것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에 지방자치단체와 국가보훈처가 협업한 사례이다.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 70대를 받고 고초를 치른 이만용 선생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 정산시장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태 70대를 받았다.
당초 정산시장 만세시위는 1백여 명의 장꾼들이 시작하였다가 일제 헌병이 30여 명을 연행하자 7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헌병이 이에 발포하여 향교직원 권흥규(權興圭, 1990 애족장)가 사망하는 등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튿날 선생은 1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권흥규 선생의 운구행렬에도 참여했다가 청양 헌병분견소에 끌려가 태 70대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선생이 태형을 받은 지 불과 4년 뒤인 1923년 9월 30대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서 일제의 악형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알 수 있다.
평남 평양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여성 독립운동가 최영보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11월 평남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진남포 기독교 장로파 지회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남 마산의 기독교계 사립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기독교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참가, 세 차례나 투옥된 여성 독립운동가 송계월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2년 함남 북청 출신으로, 1928년 5월 경성여자상업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에 참여하다 체포됐다.
1930년 1월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지지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으며, 이듬해 6월에는 경성여자상업학교 졸업생 신분으로 모교의 동맹휴학을 선동한 혐의로 다시 체포됐다.
특히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 지지시위 당시 선생은 자신의 하숙집을 서울지역 여학교 대표들의 밀의장소로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여학교 간 연락을 맡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연락을 전담함으로써 서울지역 시위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 상해와 중경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 지원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 강영파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30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상해여자청년회 창립대회 주비위원(籌備委員) 및 임시위원으로 활동하고 1932년 4월 동 회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한 뒤 1942년 한국애국부인회가 재건되자 재무부 주임을 맡았으며 1944년 3월에는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했다.
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체제를 강화하고,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데 더욱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konas)
코나스 이숙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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