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기념] (63) 존 비 코우터 장군상
흔히 “명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전투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운 장군을 칭한다. 그러나, 명장 중에서도 전투 외에 분야에서 큰 공을 세운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본다면 눈 앞의 전투는 이겼지만 후속 처리를 실패하여 평가가 깎여나간 장군들도 많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에는, 바로 그 예외에 해당되는 존 비 코울터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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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비 코울터 장군은 1891년 텍사스주에서 출생, 1911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양차 대전에 참전한 코울터 장군은 뛰어난 무공을 펼치며 이름을 드높였다.
특히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벌어진 제4차 몬테카시노 전투, 고딕 방어선 돌파 전투, 1945년 춘계 공세 등에 모두 참전하여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큰 전공을 세움과 동시에 산악전 전문가가 되었다.
이후 귀국한 코울터 장군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으로 배치되고 어김없이 전투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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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1950년 8월, 북한군이 부산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전개한 포항 전투에서 미 1군단을 지휘, 포항 방어에 성공하며 부산이 함락되는 것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코울터 장군의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대한민국 전역에는 멀쩡한 시설이 단 하나도 없었다.
도로, 병원, 주택, 교량, 철도 등 지상에 있던 모든 구조물이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코울터 장군은 유엔 한국 재건단, 일명 UNKRA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의 복구를 위해 힘썼다.
1억 달러가 넘는 구호 자금이 조성되었으며, 코울터 장군과 UNKRA는 이러한 자금을 바탕으로 산업, 의료,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재건 사업을 주도했다.
일례로, 이 시기 인천 판유리 공장, 문경 시멘트 공장 등 핵심 산업 시설들, 국립의료원, 국민부흥주택 등 의료 및 주거 시설, 그리고 각종 학교와 영농 연구소를 비롯한 교육과 농업 기구가 설치되었다. 코울터 장군은 1958년 대한민국이 복구 기조에 진입해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5년간 해당 직책을 역임했다.
코울터 장군은 이후 전역한 뒤 1983년 사망했고, 그를 기리는 장군상은 이태원에 설치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어린이대공원 경내로 이전되었다.
이렇게 전투에서 우수한 전공을 거둘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전후 복구 사업까지 주도한 인물은 세계사를 통틀어도 흔하지 않다.
또한, 코울터 장군이 대한민국의 기초적인 경제 및 사회 역량을 복원한 덕분에 대한민국은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세계에서 유래 없을 정도로 신속한 경제 성장을 이뤄내었다.
그런 면에서, 코울터 장군의 업적은 우리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지만 아쉽게도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코울터 장군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이 이렇게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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