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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결정적 전투들 - ⑨ 백마고지전투

한국군 단독작전 눈부신 전과 '탁월한 전투능력' 세계가 주목
Written by. 관리자   입력 : 2010-06-22 오전 8: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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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됐던 시기인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9사단이 중공군 38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열흘 동안이나 이를 막아내며 고지를 사수한 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 9사단은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아 이를 물리치는 동안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국군 1포병단의 화력지원과 유엔 공군의 항공근접지원하에 끈질기게 저항하던 중공군 1만여 명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 전투 배경

 백마고지 전투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비교적 쉽게 타결될 것으로 예상했던 포로 협상이 그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하게 되자, 공산군이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투였다. 백마고지 전투가 발생하기 전 쌍방은 모든 전선에 걸쳐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대규모의 전면공세를 실시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는 휴전 회담장에서 서로 유리한 휴전조건을 쟁취하려는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쌍방은 모두 그 결과를 주시하며 군사력 증강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공산 측은 휴전협상에서 얻지 못한 것을 전투에서 얻으려는 듯 유엔군이 장악한 전선의 주요 고지들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재개했다. 이때 적은 비교적 전선이 안정된 서부와 동부지역보다는 중부지역의 연천~철원 북방의 역곡천 일대에서 유리한 지형 확보를 위한 일련의 고지쟁탈전을 전개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바로 국군 9사단과 중공군이 395고지 일대를 놓고 혈전을 벌였던 백마고지 전투였다.

 그러면 중공군은 왜 백마고지를 노렸을까. 그것은 백마고지가 갖는 전략적 이점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백마고지는 행정구역상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의 야산으로 철원읍 서북방 12㎞ 지점의 효성산(596고지) 남쪽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해발 395m의 고지였다.

 하지만 6·25전쟁 전까지 이 일대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1951년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쯤부터 이 일대에서 군사적 접촉이 계속되면서 관심을 모으게 됐다. 즉, 이 지역은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하나인 철원의 서남쪽 견부(肩部)를 구성하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만약 적이 이곳을 점령하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하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중부지역에 배치된 아군의 병참선인 3번 도로를 비롯한 많은 보급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질 당시 국군 9사단은 미 9군단에 배속돼 있었다. 사단장은 춘천대첩, 동락리전투, 신녕전투 후 압록강 초산에 1착으로 도착해 청성 6사단의 신화를 낳게 한 김종오 장군이었다. 그는 1952년 5월 3일부로 9사단의 8대 사단장으로 부임해 백마고지 전투를 통해 다시 한번 국군 역사에 영원히 남길 ‘백마 9사단’의 신화를 남긴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백마고지 전투 이전 9사단의 상황은 이러했다. 미 9군단 좌익의 9사단은 이 전투가 벌어지기 1년 전인 1951년 10월 17일부터 철원지역의 주저항선에 투입돼 좌로는 백마고지, 우로는 중강리까지 11㎞의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정면의 적은 중공군 38군 예하 114사단의 340연대와 324연대였으며, 중공군 113사단이 좌 인접 미2사단 정면에, 중공군 112사단이 38군 예비로서 수정덕산 부근에 배치돼 있었다. 이들은 왜식장총, 다발총, 기관단총, 중기관총, 무반동총, 박격포 등으로 장비되고 보급ㆍ훈련 등도 양호한 것으로 판단됐다.

 사단의 주저항선은 대부분 철원평야를 가로지르는 개활지였으며 다만 좌단의 395고지 부근만 구릉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적이 효성산(619고지)을 비롯한 유리한 고지들을 장악해 사단 방어지역을 감제하고 있었으므로 전반적으로 아군은 방어에 취약했다. 특히 주저항선 5㎞ 전방에 위치한 봉래호는 작전지역의 역곡천을 범람시킬 수 있어 작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9월 22일부로 좌측에 30연대, 우측에 29연대를 배치하고, 28연대를 예비로 확보했다. 또 배속받은 51연대는 대대단위로 운용하면서 주저항선을 방어케 했다. 백마고지 방어를 담당한 30연대는 395고지에 1대대를, 중마산 일대에 2대대, 역곡천 남안에 예비 3대대를 각각 배치했다.

 사단은 적이 백마고지를 탈취해 철원평야를 제압하는 동시에 차기대공세를 위한 발판을 구축하며 철원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중부전선에서 전략적 이점을 확보해 아군을 크게 위협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이 무렵 전 전선에 걸쳐 적의 공세징후가 있어 정찰과 경계를 강화하던 10월 3일에 중공군 군관 1명이 귀순해, “중공군 114사단이 10월 4일과 6일 사이에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에 사단은 백마고지 방어병력을 2개 대대규모로 증강하고, 사단예비로 하여금 즉각 역습할 수 있도록 하고, 정찰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 전투 경과

 중공군은 1952년 10월 6일 아침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다. 적은 국군 9사단 정면에 포격한 데 이어 봉래호 둑을 파괴해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어 적 114사단이 저녁 7시 15분 30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백마고지 일대를 공격했다. 연대는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으나 다음날 밤 적이 2개 대대로 백마고지를 공격하자, 30연대는 고지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2시간 후 아군 28연대가 이를 역습으로 탈환했다.

 10월 8일 새벽 적은 다시 공격했다. 이날 적은 전날까지의 공격이 여의치 못하자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이에 국군 28연대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짙은 안개로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아침 8시 10분 어쩔 수 없이 주봉이 적에게 피탈됐다. 사단은 오후 5시 28연대 3대대를 투입해 밤 11시 5분 다시 주봉을 탈환했다.

 그러나 5차에 걸친 공방전에서 28연대와 30연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사단은 적 포로의 진술을 기초로 적의 공격이 당분간 계속되리라 판단하고, 29연대를 백마고지에 투입하기 위해 사단예비로 확보했다. 9일 밤 자정이 지나면서 적의 파상공격으로 고지 주봉과 그 우측 능선 일부를 다시 빼앗겼다. 이에 사단은 날이 밝자 적이 점령한 고지에 1만7700발의 포탄과 항공폭격을 실시한 후 29연대로 하여금 역습하게 해 이를 탈환했다.

 적은 10일 새벽 다시 공격함으로써 피아간에는 수류탄 투척과 백병전을 전개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에 국군 29연대 1대대는 일시 9부 능선으로 철수한 후, 2대대의 증원을 받아 다시 정상을 탈환했으나,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12일 아침 30연대가 29연대를 초월 공격해 이를 탈환했으나, 적의 반격을 받고 다시 빼앗겼다. 이에 28연대가 10월 15일까지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벌여 고지를 탈환했다. 뒤이어 29연대가 이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로써 약 10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중공군 38군은 드디어 전선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국군 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군 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여 일간 24회나 주인이 바뀌는 대혈전을 수행한 끝에 마침내 백마고지를 확보하게 됐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해 그중 1만여 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9사단은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3416명의 피해만 입었을 뿐이다. http://kookbang.dema.mil.kr/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이승만 대통령과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에서 국군의 전투능력과 투지를 유감없이 발휘한 결전방어의 대표적인 전투로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열했다. 9사단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계속해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다. 또 중부지역의 작전을 위해 필수적인 주요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중부지역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한국군 지휘관의 전투지휘 능력과 한국군 부대의 전투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 중 적시적절한 예비대 투입과 부대교대로 부대원들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목표탈취를 위한 투지를 견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포병 및 항공화력을 지원받았다.

 결국 이러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9사단은 철의 삼각지를 지배하기 위한 적의 전략적 기도를 꺾고 끝내 고지를 확보했다. 이 전투로 국군 9사단은 철의 삼각지대의 좌변 일각인 철원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됐으며, 중공군 38군은 그들의 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났다.

 한마디로 말해 백마고지 전투는 우리 국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6·25 전쟁사에서 몇 안 되는 ‘지상전의 꽃’이라고 부를 만한 매우 값어치 있는 전투였다. 이 전투를 통해 우리 국군의 명예는 크게 올라갔고, 이에 따라 국군 장병들의 사기도 크게 고양됐다. 이 전투는 매일 신문지상에 보도돼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군, 그리고 온 국민의 관심거리가 됐다. 따라서 이 전투는 하나의 작전 차원을 넘어서 빼앗느냐 또는 빼앗기느냐 하는 쌍방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명예를 건 싸움으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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