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시간절약하려 애국가 4절 생략? 애국심은 누가?"
“북한 김일성은 해방된 조국으로 들어오자마자 기독교인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들여 모진 고문으로 죽어가게 했습니다. 거기에 6․25가 일어나기 4개월 전부터 북에서는 인민군과 군사 장비를 남으로 계속 이동시키고, 전쟁이 일어나 남한을 정복할 것이란 소문이 꼬리를 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는 개종할 수 없는 종교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북에서 공산주의를 성공시키려면 공산주의에 가장 걸림돌인 기독교를 말살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기독교 말살과 기독교인의 숙청)에서 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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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배기 어린 아기가 모진 풍파 몰아친 중국대륙에서 해방된 조국으로 들어온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곰상스럽게 그를 대하지는 않았다. 17일 동안 조각배로 오는 도중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극진한 돌봄과 장로인 한의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져 그로 인해 그 스스로 또 하나 인생의 지향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김일성이 6․25 불법남침전쟁을 일으켜 낙동강 전선까지 일거에 쳐내려왔다가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신의주까지 치고 올라가 통일을 목전에 두었으나 20여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를 하게 되자 가족들과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나 대한민국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남한으로 내려온 소년은 구두닦이에 신문팔이 등 해보지 않은 게 없었다. 누나도 껌팔이에 나서야 했다. 어쩌면 전 국토가 파괴, 유린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처절한 그 시절을 살아야 했던 동시대인이 겪어야만 할 필연적 시련이자 고난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진부하고 무책임한 철부지 사고라 얘기할까.
그러나 그 때 대거 피난민의 일원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소년은 어느새 칠순(古稀)을 바라보는 연륜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가관과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자유민주주의 통일전도사에, 사회적 명망가,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작은 것이라도 자신을 들어내 보이려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그러면서 일에 대해서는 매사 철저하고 꼼꼼하며, 아닌 일(不正義)에 대해서는 반듯한 냉철함을 함께 소유한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이었다. 대화 속에서도 그의 행보는 멈춤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크게 아파 기독교 장로 한의사의 치료와 기대를 통해 새 삶을 얻을 수 있게 된 게 큰 계기이자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 정신이 몸속에 스미고, 나라사랑이 전제된 국가관과 애국심이 한편으로 자신감을 안겨준 것 아닌가 하는 생각과 사회활동을 통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허창식(許昌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경기도 광주시 협의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북한 김정은 집단의 3차 핵실험에 이어 ‘서울과 워싱턴 불바다’ 협박, 미사일 발사 임박 등 전쟁직전 상황과 같은 겁박으로 한반도 긴장의 파고가 최고조에 접어들면서 국민들의 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곧추선 시점에서 시 협의회 자문위원들과 백령도 현지 방문을 앞두고 있는 허창식 회장을 광주시청 내 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약속된 시간보다 20여분 늦게 도착했지만 허 회장은 반갑게 필자를 맞아 주었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나 조금은 언짢은 기색이 들 법도 하련만 얼굴 가득 환한 웃음로 대해주는 그의 모습에선 마치 오래된 이웃 동네 아저씨와 만나는 것만 같은 착각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질문부터 던졌다. 최근 우리사회 안보현실과 통일에 대한 생각, 미래세대의 주역들에 대한 바람과 어떻게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 한 것인가 등을 물었다. 허 회장의 답변은 정제되었다. 사업가이자 경제인으로 2007년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광주시협의회 13․14․15대 회장을 3대째 연임하고 있는 허 회장으로부터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함께 특히 나라사랑 정신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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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허창식 회장과의 인터뷰를 요약 정리한 내용임.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역할과 광주시협의회 평통자문위원의 활동은?
- 자랑부터 조금 할까요(웃음). 경기도 민주평통자문회의 행사에서는 애국가 4절이 필수입니다. 애국가 4절이 우선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게 우리사회의 현실입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민주평통자문회의 전국 대회에서도 애국가를 4절까지 한 적이 없어요. 애국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자 시대정신입니다. 보세요, 애국가 4절이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나 (이승만 대통령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고 하신 말씀, 그때나 지금이나 당대 ‘시대정신’이 여기에 담겨 있어요. 글로벌시대 평화통일 지향점에서 대한민국다운 대한민국을 찾자는 의미에서 5년 전부터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4절까지 담은 동영상을 제작해 전국 각 지역 우리 민주평통협의회에 보냈습니다. 애국가 4절까지 정확히 7분이에요. 어떤 행사에서든 제일 중요하고 핵심이 애국가고,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선열에 대한 예의(묵념)인데... 애국가만한 축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걸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귀찮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美 국민들이 왜 애국심을 발휘하겠어요. 6․25 한국전쟁 때 36,900명의 미군이 전사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 워싱턴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방문해 태극문양의 꽃다발을 바치는 아름다운 모습을 봤어요. 미국은 다양한 민족이 혼재하는 인종시장 국가입니다. 그럼에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충성하는 그 바탕에는 ‘국기’(성조기)가 있습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집에도, 옷에도, 자동차에도 ‘국기’를 다는 게 일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애국심을 갖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더욱 애국심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전쟁위협이 높은 나라일수록 필요한 게 애국심이고 키워드(Key Word)가 '태극기'와 '애국가'라고 봅니다. 우리 민주평통의 존재의미 또한 애국심을 키우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작년 10월18일 그래서 우리 협의회 주관으로 태극기 설치 행사를 가졌습니다. 자문위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태극기 공원을 만들고 그곳에 1년 24절기를 상징하는 의미로 대형태극기를 중심으로 24개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또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태극기를 볼 때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치게 되고 하지만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주 보면 다르게 마련이지요. 무심결에 보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와 닿는 무언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애국가 4절 부르기 운동과 태극기 공원을 생각한 것입니다.
▲ 자문위원들이 백령도 안보현장을 방문한다. 시기적으로 민감한 점도 있을텐데, 백령도를 찾는 이유는?
- 북한이 공갈협박을 가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우리말에 방귀가 잦으면 변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욱하는 점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잘 알겠지만 백령도는 38선 이북으로 한참 올라간 최전방 지역이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눈에 가시가 백령도 일 것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지금 15기가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경기도 광주 협의회 13․ 14․15대 회장으로 경기지역 최고참 중 한사람이다. 현 직에서 더 이상 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보고 있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의한 심각한 위협이 계속 제기되고 있는 시점에서 백령도를 계획한 것은 어쩌면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회원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떳떳하게 ‘해 볼테면 해봐라’ 하는 측면과 이런 때일수록 우리 자문위원들이 평화통일에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뿐 아니지만 북한이 선전포고 성 위협을 해도 굳건한 대한민국을 지키는 국군이 있고, 대범한 국민이 있기에 정말 좋다. 지난 4월 미국 출장을 다녀왔는데 미국서 만난 친구들이 국내 사정을 잘 알고 심각하게 보며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실감하고 왔다.
▲ 백령도 견학에 고교생들도 참석하는데, 특별히 학생들을 포함한 이유가?
- 폴란드가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시절, 나치의 강제수용소가 세워져 350만 명의 무고한 유대인들이 죽어간 아우슈비츠에는 지금도 그때의 수용소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즈에 의해 학살된 당시의 유골들이 아직도 학살 현장과 박물관에 그대로며 이런데를 학생들이 보고 느끼면서 깨닫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판문점이나 군부대 등 안보현장 견학을 통해 애국심과 국가관을 스스로 체득케 해야 한다고 본다. 저는 제일 걱정이 초등학생이라고 본다. 초등학생 67퍼센트가 애국가를 제대로 모른다고 한다. 우리 때는 애국가 4절에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다 외우고 국기 하강식 때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장난스럽고 형식적인 것 같지만 거기에서 애국심이 싹튼다고 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제는 가정교육부터이고 전교조 교사가 문제다. 그래서 우리 광주시 협의회는 어떤 행사에든 학생들과 함께 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학부모들이다. 이번에도 학생들과 함께 가고자 학교에 공문을 보내 협조를 하는데 전체 학교에서 너도 나도 더 많은 인원을 보내겠다고 대단했다. 학부모님들이 앞서서 동의하고 요청한다는 거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 면에서도 우리 민주평통자문회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 통일은 언제쯤? 통일을 위해 우리가 우선해야 할 일이 있다면.
- 이명박 전 대통령께서도 재임 시 평통자문위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바람같이, 도둑같이 온다고 하셨다. 독일 통일은 예상도 없이 왔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독일통일의 물결을 동독 정부가 막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예상치 못한 어느 날 갑자기 올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항상 대비하고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통일에 대한 확신과 의지, 정신적 자세가 돼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평통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우리사회에 잔존하는 뿌리 깊은 갈등, 예를 들어 남남갈등이니, 지역갈등, 계층갈등 같은 게 없어져야 할 요소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반목하는 불신풍조 해소가 우선되어야 한다. 해서 우리 협의회는 나름대로 지역 평통 협의회와 물꼬를 트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전라북도 무주협의회, 강원도 동해시협의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를 활성화하고 있다.
막힌 구석이 없다. 서로 왕래할 때 마치 친구 집이나 처갓집에 놀러가는 기분으로 오간다. 이렇게 누군가 한사람이 먼저 나서고 사회저변에서 조금씩 시작해 각계에 퍼지게 되면 작은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한다.
▲ 북한에서 태어났다. 북에 대한 기억도 있을 텐데.
- 부모님 고향이 평북 선천이다. 선천은 외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한 곳이다. 그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고 주변 선천, 정주, 신의주, 철산 등이 우리나라 초대 독립운동 발상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또 그 지역 거의 모든 남자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나의 아버지도 일본 헌병에 매질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고 해방 1년 전 그곳에서 태어났다.
꿈에 그리던 해방이 되던 해 우리는 중국에서 그리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이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 배를 타고 왔는데 오는 도중(소형 배로 17일간 항해 했다고 후일 모친으로부터 들은 당시 상황을 전해줌) 병이 나 사경을 해매였으나 용케 장로 한의사를 만나 고비를 넘겼고, 그 한의사께서 치료비를 받는 대신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게 인연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허 회장은 현재 기독교 장로)
해방된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은 당시 민심을 얻기 위해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죽음으로 내몰게 했는데, 큰 농토를 가지고 있던 우리 집안도 1차 숙청대상이었다고 한다.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평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교회에 열성적이셨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은 1950년 6월25일 전쟁을 일으키고 기독교인들을 잡아가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개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독교 가정(어머니 권사, 외삼촌 목사)에서 태어난 김일성이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우리들을 데리고 무작정 집을 떠나 친척집에서 남의 집 일과 날품팔이를 해주며 3개월여를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평양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 아버지를 만났는데, 이때는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했을 때다. 결국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1951. 1.4후퇴)하게 되자 우리 가족은 공산당의 만행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나 국군을 따라서 월남하게 되었다. 그게 고향과는 영영 이별하게 된 계기다.
아무런 친척도 없이 남한에 와서 오늘까지 이렇게 우리 가족이 살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 품에 안기게 되기까지 모든 것은 예수님 덕이라고 본다. 신앙의 힘이고 하나님의 은혜다.
▲ 어려움이 많았지만 사회적 명망과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했다.
-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해야 하는데 가고 싶은 데가 없었다. 법대를 가면 나쁜 놈 조사하고 벌주고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고, 의대를 가면 아픈 사람과만 상대할 것이고, 상대를 가면 이문을 남기는데 온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 딱 가고 싶은 데가 없었다.
그런데 신문을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앞으로 부강해지려면 가진 자원이 ‘산’인데 ‘산’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 기사를 봤다. 또 산을 울창하게 하려면 축산을 장려해서 비옥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보니 바로 ‘필’이 왔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다음 날 바로 원서를 제출했다. 나중에 보니 전국에서 가장 비율이 높더라. 20:1이었다. (웃음)
나 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이 또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운 좋게 합격은 했는데 (집안에)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매일 기도했다. 축산업을 하게 해달라고.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당시 함께 공부하던 과(科) 친구들은 많이 중간에 그만 두고 다른 길로 갔다. 하지만 나는 한우물만 팠다. 당시 한강은 시골에 모래사장이 많았다. 주인 없는 하천부지도 부지기수였다. 마침 하천변에 호박을 심는 어느 할아버지를 만나 얘기가 통해 300여평 정도 하천 부지를 받았다(그 분도 주인이 아닌 듯). 그렇게 시작해서 하천 모래로 벽돌을 찍고,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했다.
누나, 형님들이 난리였다. 못하게, 부모님 고생시킨다고. 교사 자격증도 있어서 학교 선생도 할 수 있었지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 정부에서도 축산 장려를 위해 1개 군에 한사람씩 독농가를 선발해 대출을 지원해 주었다. 더욱 멈춤이 없었다. 미친놈처럼 쉬지 않고 했다. 동네에서는 내 모습에 정신 이상자로 보기도 했다. 나중엔 대학까지 나온 사실을 알고 다시 보게 되었지만..... 그렇께 하자 돼지 한 마리가 10마리, 100마리가 되고, 300마리가 되어갔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그리 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해서 인정도 받게 되었다. 광주 축산업협동조합장도 했다. 조합장 하는 동안 단기간 전국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조합장을 하면서 보니 자리로 보면 시쳇말로 조합장이 좋은 자리인 것 같다. 하지만 임기를 마치고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내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원들이 계속 찾아와 더해주기를 간청하고 내가 어머니 말씀을 잘 따르는 것을 알고 어머니에게까지 찾아와 만류토록 했지만 아니었다. 그만 두었다.
그리고 지금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광주시협의회 회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도 마찬가지, 감투라고 생각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통자문위원은 내가 꼭 한번은 해야 겠다고 마음먹어서 한 것이다.
▲ 미남에 건강미가 넘쳐 보이는데, 비결은.
- 사람은 얼굴이 인격이라고 본다. 얼굴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왔는가를 조금은 알게 된다. 여자들이 왜 화장을 하겠는가? 화장하기 전 자기 모습보다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지 않나. 왜 (화장으로)속이나? 반듯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런가? (웃음) 농담이다. 웃고자 하는 말이다.
▲ 감사합니다.
※ 허창식 회장은 광주시에 대규모 골프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이자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 지역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지난해 10월 청석공원에 태극기공원을 만들었다. 시 평통자문위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태극기를 기증하고 지금은 지역 명물 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처음에는 1천개 태극기 게양을 생각했다고 한다. 본인은 한사코 부인하며, 익명의 독지가가 기증했다고 하지만 공원에 게양된 4천여만원에 해당하는 대형태극기 비용을 허 회장이 기부했다고 나중 배석자 한분이 귀띔해주었다.
미래세대의 주역 학생들에게 애국가와 태극기를 통해 애국심과 나라사랑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허 회장의 평상시 지론을 행동으로 표출한 것이다.
□ 허창식 회장은?
• 1944년 음력 3월 중국에서 출생
• 고려대학교 축산과 졸업
• 광주청년회의소(JC) 9대 회장
• 광주지구축산업협동조합 11대 조합장
• 고려대학교 교우회 광주지부 4대 회장
• 하광상공회의소 제5대 부회장 (현)
• 광주문화원 부원장 (현)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경기 광주시협의회 제13․14․15기 협의회 회장 (현)
(konas)
이현오(코나스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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