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6월은 뜨거웠다
물론 대학생들이 주동이었습니다. 그것이 후진사회의 특색입니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면 후진국에서는 학생들밖에는 일어날 계층이 없습니다. 중국의 신해(辛亥)혁명도, ‘5‧4운동’도 주동세력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그 해 6월의 최대의 이슈는 한·일 국교 정상화였는데,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일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다만 국교를 정상화함에 있어 한국정부의 ‘비굴한 자세’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입니다. 정상화를 반대하는 학생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우리의 군사정권은 위기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일본과 손잡지 않고는 우리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길이 없었습니다. 새로 등장한 군사정권에 대해 국제사회에 호감이 있었을 리 없고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경제 원조를 크게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일제 침략 36년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면서 상당한 액수의 유상(有償) 원조도 곁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군사정권의 딱지를 떼어버린 지 한 1년 밖에 안 되는 공화당 정권으로서는 사활의 갈림길에 선 느낌이었을 것이고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국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감행하는 것이니 일본은 적극 우리를 도와야 한다.” - 아마도 그런 논리가 일본정부에 먹혀 들어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한국전쟁(1950~53) 특수에 큰 재미를 보고 경제 발전의 황금기를 맞아 이미 경제 강국이 되어 있었고 한국은 전쟁의 참화를 아직 다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박 정권은 그 돈을 나눠먹지도 않았고 낭비하지도 않았고 고스란히 조국의 경제 발전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 일이 ‘한강변의 기적’에 이어진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민족의 정기(正氣)를 되살리고자 분발한 1965년의 젊은이들도 칭찬할 만하지만 돈 때문에 부잣집 문전에 읍(揖)하고 서서 저 자세로 기다리던 그 비굴함도 가상타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Samsung이 Sony를 이기는 (당분간이 될지는 몰라도) ‘한강변의 기적’은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동길(www.kimdonggill.com) ‘자유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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