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鬪爭)뿐이라면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로 시작되는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불렀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어쩔 수 없이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왔습니다. 희(喜)와 비(悲)가 엇갈린 인생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즐거운 인간 세상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런데 일단 와서 보니 이 세상은 사람이 마음 놓고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날마다 싸움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의 투쟁이다”라고 결론짓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호소하면서, “우리가 싸워서 잃게 될 것은 쇠사슬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끊임없는 싸움이 곧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이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투쟁으로만 일관하였다면 오늘의 인류 문화는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물론적 변증법’도 ‘정(正)’과 ‘반(反)’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합(合)’의 필요를 제시합니다. ‘합’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 공산당이 성취해야 할 과제였는데 오히려 스탈린, 후르시쵸프, 브레즈네프는 일반 인민이 누리지 못한 온갖 특혜를 독점하여 지배 계급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자유도 평등도 없는 나라가 되어 고르바쵸프와 옐친은 본디 그들이 타도하기로 결심했던 서방 세계의 자본주의에 대해 백기(白旗)를 든 셈입니다.
역사가 계급의 투쟁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닌 상 싶습니다. 계급과 계급이 투쟁만 하지 말고 ‘상호부조(相互扶助)’(Mutual aid)하라는 말은 Kropotkin(1842-1921)이 만들어낸 평범하고도 특이한 낱말입니다.
‘상호부조’가 ‘계급투쟁’보다는 훨씬 희망적인 표현입니다. ‘계급의 투쟁’이 Kremlin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그 엄청난 유혈(流血)소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김동길(www.kimdonggill.com) ‘자유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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