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무요원 수기 ‘완생(完生)을 향한 길“(입선)
병무청은 지난 5월 24일∼ 6월 21일까지 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를 공모해 선발된 내용을 책으로 엮은 '2019 젊음, 향기로 피어나다'를 9월 26일 발간했다. 2006년 시작된 체험수기집 발간은 올해가 14번째로 사회복무요원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겼다. 코나스는 병무청의 협조 아래 우수작을 중심으로 게재한다.<편집자 주>
아이들의 선생님, 어르신들의 손자로
저는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조금 하다가 사회복무요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것 같던 아이들과 잠시 이별하고 인생의 첫발을 내딛는 아이들과 조금은 대조적일 수 있는, 인생의 완성을 구성할 발자국을 남기는 어르신들을 위해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재작년 12월, 저는 복무기관 본인선택으로 특수학교와 노인복지 시설 중에서 상당히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특수학생에 대한 경험은 교직에 있으면서 꾸준히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런 때 아니면 평생 못 해볼 것 같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집이랑 멀지 않아서 노인복지시설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행히 제가 선택한 곳으로 근무지를 배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선배선생님, 동료선생님들의 격려를 받고 2년 후를 기약하며 훈련소를 무사히 다녀오고 본격적인 저의 복무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하얀 거짓말
사회복무요원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저는 근무를 시작하면서 곧 소집해제 하는 선임한테 이것저것 한창 배우고 있었습니다. “저 어르신은 식사하실 때 반찬을 잘게 썰어드려야 해.”, “어르신들이 답을 잘 안하시더라도 말벗을 해드리면 속으로 좋아하셔.” 그리고 제가 배정받은 생활실에 한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시는 이분은 치매, 약간의 시각장애, 청각장애 등 생활이 상당히 불편 하신분이셨습니다. 어르신이 “우리아들 ○○이 맞나?”, “우리아들 어디 있나?” 이렇게 물어보시면 선임은 검지를 척 들면서 천장을 가리키며 곧 올 거라고만 했습니다. 저는 선임한테 아드님이 정말 옥상정원에 계시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선임은 자기도 그냥 선임한테 알게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그 행동을 보았을 때는 겉보기에 조금 안좋은 것 같아 보였지만 여기서 2년을 근무한 선임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런 줄 알고 지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요양원의 직원들과 사회복무요원들은 다 같이 어르신들을 위해서 정원과 건물옥상에 한창 꽃을 다시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날씨가 선선하면서도 푸근한 때를 골라 어르신들을 모시고 건물 옥상과 마당 산책로에 있는 꽃들을 함께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어르신도 이번에 나와 계셔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어르신은 상태가 더 심해지신건지 묵묵부답 그냥 멍하니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마저 일을 했습니다.
정원에 화단 작업을 마저 다하고 나서 꿀같은 휴식시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득 그 어르신이 생각나서 어르신이 계시는 생활실에 가서 인사를 다시 한 번 드렸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아드님을 찾으시면서 이번에는 제가 당신의 아드님이신 줄 알고 이것저것 근황을 물어보셨습니다. 옆에서 보고 계시던 요양보호사님은 “아이고, □□어르신 아드님 찾아오셨네요.”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저는 아드님인척 어르신의 말씀에 맞장구를 쳐 드리며 말벗을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식사시간이 되어 식사수발을 해드리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선임이 알려준 천장을 가리키는 행동과 방금 한 아드님인척 말벗을 해드리는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일까? 계속 이렇게 해도 될까?’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저는 직무교육을 받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선생님께서 활동을 한 가지 하셨는데, 사회복무요원들이 어르신들과 관련해서 궁금한 점을 익명으로 질문하고 거기에 답변을 해주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거다 싶어 궁금증을 적어서 제출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차례차례 익명의 사연과 질문들을 읽고 답변을 해주시다가 드디어 저의 질문차례가 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힘들더라도 그렇게 해달라는 게 선생님의 답변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부모님께서도 비슷한 상태라서 더 공감이 간다고 하시면서, 그렇게라도 안심시켜 드리면 어르신들한테 정서적으로 상당히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얀 거짓말은 말기 암환자에게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복무생활 중에서 사소한 말이나 행동들이 자녀분들과 어쩔 수 없이 떨어진 어르신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있어서 저는 자녀분들 만큼의 충분한 정서적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큰 뿌듯함을 느끼게 되었던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눈물 젖은 백숙
제가 일하는 근무지에는 면회실이 있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어르신과 면회객 가족분들의 여러 가지 상황을 보게 됩니다. “엄마 내 이름이 뭐고?”, “......”, “엄마 내 어렸을 때 엄마가 내보고 이름보다 막둥이라고 많이 불었던 거 기억나나?”, “몰라.” 등등. 이런 대화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날도 그런 평범하지만 특별한 대화가 오가는 모자간의 면회 과정을 듣게 되었는데, 그날따라 뭔가 뭉클했습니다.
분명 저 할머니께서도 젊었을 적에는 저의 어머니처럼 아들이랑 자연스럽게 말하고, 아들은 엄마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얼마동안은 그러한 상황자체를 부정하려고도 해보고 여러 가지 치료방법이 없을까 애타게 발품 팔아가면서 여기저기 상담도 받고 병원도 가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도착한 종착지가 결국 여기이고, 여기에서 이렇게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고, 누구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그러한 잔인한 현실을 온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상황들을 상상해 보다가 퇴근시간이 되었고, 집에 가니 부모님께서 마침 복날이니 오랜만에 가족끼리 외식을 하자고 하셔서 백숙을 먹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어떤 이유로 부모님이 식당에서 서로 큰소리로 다투었습니다. 그 사이에 끼여 있던 저는 어찌할 줄 몰라 했고 화가 난 어머니께서 먼저 일어 나서셔 그냥 혼자 나가셨고, 저랑 아버지만 덩그러니 식당에 남아 사람들의 나머지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백숙과 그 뒤에 나오는 닭죽을 억지로 욱여넣듯이 다 먹고 나서 저도 나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나가셔서 집에 가신 게 아니라 식당 앞에서 저를 태우려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오늘 근무지에서 있었던 어르신과 자녀 분과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렇게 서로가 누가 누군지 당연하게 잘 알기 때문에 사소한 이유로 다투지만, 나중에 우리 부모님도 그 어르신처럼 치매가 혹시 걸리게 되면 나를 알아보시지도 못할 것이고, 이렇게 다툼도 할 필요가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먼 미래의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엄마 내 이름 뭐고?”, “엄마가 그렇게 사랑했던 재성이 아니가.” 부모님께 제가 누군지 묻고,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그런 상황들이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부모님이 다투고 난 뒤의 이런 상황을 기억이라도 하라는 듯 눈물로 만든 조각칼이 제 두 볼에 그 순간을 새기는 듯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각칼이 저의 숨구멍도 좁혔는지 끅끅거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자 당황하신 부모님은 저를 안아주시고는 일단 다툼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또 다투시나보다.’ 하고 말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따라 요양원에서의 어르신과 자녀분의 대화가 저의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한층 더 크게 만들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곳은 모든 부모님들의 인생에서 마지막 종착지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어르신들 중에서 저의 부모님이 겪게 되실 마지막 생활은 어떨지, 혹은 어떠하면 좋을지 가끔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보니 ‘저렇게 되면 정말 안타까울 것 같다.’, ‘삶의 마지막 여정으로써 저런 모습도 나쁘지 않겠다.’ 등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보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저의 부모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따뜻한 아침밥, 늘 채워져 있던 화장실의 수건들, 포근한 잠자리 같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에 대한 저의 행동을 성찰해보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단순히 집이랑 가까워서 스스로 선택한 근무지에서 이렇게 저, 부모님, 가족 간의 관계를 깊이있게 돌이켜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부모님과 독립해서 살아야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오늘도 부모님의 당당한 아들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완생(完生)을 향한 길
사회복무요원을 하고 있다고 하면 반응은 보통 비슷합니다. “아...” 그 짧은 한마디에 그 사람의 복잡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1년 동안의 사회복무요원 생활은 저로 하여금 이런 복잡함을 풀어낼 자신이 생기게 만들었습니다. 어르신들에게 있어서 사회복무요원은 나라를 지키는 것과 같이 나름의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해 내는 사람입니다. 어르신들의 노후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도 뜻깊게 다가옵니다. 지금은 주름진 겉모습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지만 지금보다 빛났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고, 한때 누군가에게는 자랑스러운 자식이자 부모였다는 사실을 일깨우게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삶의 어느 지점보다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어르신의 인생에 있어서 사회복무요원의 역할은 삶의 대단원을 아름답게 장식해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드라마 ‘미생(未生)’에서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버티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배우다 보면 어쩌면 완생에 이른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완생이라는 것은 목표로써 존재할 때 그 가치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어르신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완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미생이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르신들께서는 저와 같이 생활하시면서 아름다운 완생을 향해 나아가시고, 저는 어르신들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드리며 사회복무요원으로서의 완생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배재성(복음양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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